KTX를 타고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
가끔 떠나는 출장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오피스라이프에서 느껴지기 쉬운 단조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합법적이며, 값지불도 그리 크지 않다.
홀로 기차에 오를 때마다 쓸데 없는 기대가 마음을 사로 잡는다. 그것은 영화 ‘비포선라이즈’와 같은 인연이 시작되지 않을까하는 부질없는 기대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단언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한 지금까지 홀로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여성이 옆자리에 탑승한적은 없었으며, 1%의 확률로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일이 있더라도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 확률은 1%에 가깝고, 심지어 그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 확률은 0%에 수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유구한 역사를 영위할 수 있었던 어떤 원동력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 원동력은 ‘꿈꾸기-망각하기-다시 꿈꾸기’ 매카니즘이다.
기대 불일치에 따른 실망으로부터의 빠른 회복, 그리고 또 다시 품게되는 근거 없는 기대, 이러한 반복적인 매카니즘이 없었다면 인류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인하여 진작 멸종했을지 모른다.
나는 ‘비포선라이즈’를 매우 좋아한다. 개봉 당시에는 10살 남짓 어린이었기 때문에 10년여가 흐른 뒤에나 보게 되었지만, 여러 번 봤고, 재개봉으로 극장에서 또 봤고, 대본집을 사서 대여섯 번 남짓 소리내어 읽었다(처음엔 민망하지만 재미있다).
영화로 인해 내게 판타지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영화가 제작된 계기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희망을 은연 중에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감독과 배우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품고 있던 판타지-여행의 설렘, 그 가운데 (심지어 심각하게 섹시한) 청춘 남녀의 우연한 만남, 애써 짜내지 않아도 무궁무진하게 샘솟는 대화, 서로 너무 다르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순식간에 끌어당기는 성적 긴장감, 그 모든 것이 달콤하게 녹아드는 아름다운 전경-를 시청각적으로 매우 잘 구현해냈기 때문에 로맨스 무비의 고전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역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여인과의 설레는 대화 따위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판타지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며 부산으로 향하고 있다.
물론 돌아올 기차에서의 판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까지는.
부산으로 가는 KTX가 아닌, 비엔나로 가는 유레일 타보신 후에 실망하는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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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여로형 구조의 단편 소설로, 다음편이 나와야할 것같이 마지막을 마무리하셔 궁금증을 자아내네요. ㅎ 소설의 발단부분같아요 ㅋㅋ 속편은 없는건가요…..?ㅋㅋㅋ
취미가 미술사/전시 콘텐츠가 많은 sns(블로그, 페이스북)및 온라인까페 구경이라 조금씩 조금씩 읽다가 여기까지 내려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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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후속편이 없다는 것은 이야깃거리가 없었다는 뜻이겠죠? ㅜ_ㅠ
덕분에 ‘여로형 구조’라는 좋은 지식의 실마리를 하나 얻어 갑니다.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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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병이랑 국어과외샘병인가봐요 ㅋㅋㅋㅋㅋ올해 수능특강에도 여로형 소설 나왔고 작년에 내신대비할 때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여로형소설이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먹고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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