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온 가장 큰 목적인 국립서양미술관에 가는 날이었다.
우선, 전날 해결하지 못한 현금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신한은행 우에노지점으로 가장 먼저 달려갔다. 숙소에서 불과 3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을 알게 된 것은 현찰이 없다는 절박한 위기에서 비롯된 정보력의 결과였다. 신한은행은 도쿄에 단 2개의 지점을 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우연히도 숙소와 같은 동네라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이곳만 가면 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오픈 전에 이미 도착하여 셔터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오직 나만을 위하여 전 지점 직원들의 일본 특유의 유난한 단체 인사가 끝나고, 나는 현금 문제의 해법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한국과 계좌 연동을 통한 지점에서의 인출은 불가하고, 다만 내 현금카드가 국제카드 규격에 부합한다면(비자, 마스터 등), 세븐일레븐에서 내 계좌 연동을 통한 즉시 엔화 인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현금카드 겸 체크카드가 국제통용 카드라는 것 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고, 이렇게 간편하게 인출 가능하다는 것은 더더욱 신선하고 유용한 정보였다. 세븐일레븐이 자랑하는 세븐뱅크는 거래명세서 마저 한글을 지원할 정도로 완벽한 한글화를 보여주었고, 나는 수수료율 90% 우대 당시보다 3만원 정도를 더 투자하여(혹은 버려가며) 4만엔을 인출할 수 있었다. 현금 부족 문제에 대한 과도한 심리적 압박의 반대급부로 인하여 과다인출 하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다….
어쨋든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세븐일레븐 PB컵 커피를 들고 여행의 주목적인 국립서양미술관으로 향했다.
이거 정말 맛있다. 설탕으로 조지는 우리나라 컵커피와는 차원이 다르다. 부드럽고, 커피 본연의 풍미도 느껴지는…. 제발 출시 부탁드립니다, 세븐일레븐 관계자 여러분
첫번째 전시, 독일 동판화 특별전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일본국립서양미술관은 그의 다른 건축물들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조속히 통과시키기 위해 자국 법에 특례조항을 만들면서까지 48살밖에 안된 이 건축물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무리수를 강행하였고, 이는 결국 세계문화유산 선정이라는 원하던 성과로 귀결되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이라는 타이틀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나 우리나 다를 것이 없지만, 어쨋든 진짜 성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은 그들이 앞선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국립서양미술관은 그 존재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다. 동양의 나라에 서양미술관이 있다. 물론 서양이 우리보다 우세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기리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의 원류(주류)가 그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서양미술, 그것도 서양미술의 거장 중의 거장들의 작품으로 건물 전체를 가득 채운 국립 미술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눈물겹도록 부럽다. 집앞에 나가면 공원에 미술관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마네가 있다. 피카소가 있다. 루벤스가 있고 반 다이크가 있다. 이런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과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특별전을 통해서만 고흐를 볼 수 있는 사람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도, 그 깊이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 건물을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 예술은 자본에 종속되지 않지만 자본은 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서양미술관의 상설전시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라는 교훈을 되새기며 특별전으로 이동했다. 특별전을 보면 상설전 입장도 가능하므로 가지 않을 이유는 당연히 없었다. 특별전 타이틀은 “성스롭고도 세속적인, 이스라엘 판 메케넴과 초기 독일 작가들의 동판화” 전이었다. 제목처럼 메케넴을 중심으로 르네상스 시기에 독일권에서 활동했던 거장들의 동판화 작품들이 100점 이상 전시되었다. 메케넴의 작품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판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에게 있어서 사실 그는 생소한 작가에 가까웠고, 나에게 있어서 이번 전시가 갖는 가장 큰 의미이자 영광은 뒤러의 작품들을 다수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이 자랑하는 르네상스의 대표 천재, 화가, 기하학자, 미술이론가로서 엄청난 창조성을 보여주었으며, 신앙심의 표본이기도 했던 그의 작품을 코앞에서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메케넴의 작품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들여온 것이었는데, 뒤러의 작품들은 대부분 국립서양미술관 자체 소장품이었다. 뒤러 정도의 거장의 작품들이 창고에 쌓여있고, 특별전 테마가 맞아야 관람객들 앞에서 빛을 보는 수준의 미술관이라니, 새삼 다시 한번, 너무나도 부럽다.
전시는 타이틀처럼 크게 종교화 세션과 세속화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종교화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태고지,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 교부들과 성자의 이야기들이었다. 특별한 것은 세속화였는데, 아무래도 책이 금처럼 귀했고 귀족, 왕족, 거상, 교회가 모든 출판권을 독점했던 시대였던 만큼 교훈적인(계몽적인)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동판화 작품 대부분은 인쇄된 얇은 종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액자에 고이 안치되어있기에, 코 앞까지 다가가서 볼 수 있었는데, 어떻게 이토록 세밀하게 선을 쪼개고 쪼개고, 겹치고 겹치면서 음영을 창조해내고 세밀한 타이포그래피와 테두리 장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인지 연신 놀라며 관람을 이어갔다. 작업 순간을 눈앞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 전시의 또 다른 의미는, 동판화라는 매체 하나만 가지고 이 정도 규모의 특별전을 열 수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역시 알고 있던 대로 일본은 전문화의 나라, 세분화의 나라, 그리고 오타쿠의 나라이다. 동판화라는 매체에 집중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거니와 100여점 이상을 모을 수 있다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었을텐데, 그들의 예술 인프라는 이것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충분한 시장과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 전시, 국립서양미술관 상설전시
이번 여행을 통틀어서, 르네상스 베네치아 전에 이어서 두번째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국립서양미술관의 상설전으로 이동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작품 수가 너무 부족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한번 보고 소화가 안되면 다음날 다시 와야겠다는 염두도 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로 작품 수가 많지는 않았다. 물론 전시된 작품의 수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만족, 또 만족했다.
랜드마크적 거장들은 거의 다 있다고 보면 되는 수준이었다. 보티첼리, 루벤스, 엘 그레코, 티치아노, 밀레, 세잔, 르느와르, 고흐, 고갱…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는 거장들이 눈 앞에서 숨쉬고 있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밀레의 ‘봄’이었다(그림보기). 일단 크기로 압도하는 감각적 경험을 무시할 수 없고, 공간을 가득 매우는 순수하고도 희망찬 알레고리화된 자연의 이미지들이 사람의 기본을 고양시키는 미술의 순수한 힘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새끼 오리’도 인상적이었다(그림보기). 이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 그림이라니… 마리 가브리엘 까베의 ‘자화상’도 인상적이었다(그림보기). 하늘하늘한 새틴 옷감은 손대면 바스락 하며 만져질 것만 같았고, 청초한 볼의 색조와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당대 드문 여성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팔레트, 모든 것이 그저 조화로워서 눈을 때기 쉽지 않았다.
많은 작품들을 이제 다시 보기 힘들것 같다는 절박함으로 필사적(전투적)으로 감상했다. 망막세포에 이 상을 고정시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찬찬히, 찬찬히 느끼고 싶었다.
감상을 마치고, 왠지 한번쯤은 미술관 부속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겨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들어 1층 스이렌에서 스테이크 정식을 먹었다.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지만 어쩐지 일본식 같은 건물 중앙 정원을 바라보며 작은 사치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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