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신미술관으로 가는 지하철 통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전시다. 원래는 국립서양미술관이 최대 기대 코스였지만, 국립신미술관에서 베네치아 르네상스 전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가장 좋아하는 시대와 가장 좋아하는 지역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물론 개인적으로 바로크 시대를 가장 좋아하지만, 바로크의 태동에 베네치아의 빛과 색이 미친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연장선상에서 바로크의 태동 직전, 변화된 양식과 인식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난 르네상스 미술 중에서도 베네치아의 작품에 계속 끌렸었다. 벨리니, 조르조네, 티치아노, 틴토레토로 이어지는 베네치아의 미술 계보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빛과 색의 힘이 느껴진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이 그냥 아름답고, 감정적이다. 이전의 시대에는 느껴지지 않던 따뜻하고 감성적이며, 한편으로 사치스럽고 격정적이기도 한 그 느낌이 좋다. 그래서 최근 몇년 동안 가고 싶은 곳 1순위로 꼽는 지역이 베네치아 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공수한 것이다. 아쉽게도 벨레니의 작품은 하나 밖에 없었지만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 바사노, 파도바니노 등 평소에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들을 마음껏 눈여겨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기회였다.
가장 인상깊은 작품은 역시 티치아노의 ‘수태고지’ 일 수 밖에 없다(그림보기). 베네치아 전설에 따르면 베네치아의 건국일은 수태고지 날짜와 동일하다고 한다. 카톨릭 국가에서 성모 숭배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의 성모 사랑은 각별하다 못해 넘쳐 흐를 정도이다. 4미터 높이에 달하는 이 작품은 안 그래도 높은데, 하나의 단 위에 높게 걸려져 있고,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독립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산살바토레성당에 걸려 있는 그 각도에서 느껴지는 현장의 느낌을 최대한 고스란히 전해 주기 위해 그렇게 구성한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수 천, 수 만, 수 억에 달할지도 모르는 그 많은 유럽의 수태고지 그림 중에서도 이처럼 격정적이고, 사치스러우며, 휘황찬란한 수태고지는 단언코 없다. 말이 수태고지지 거의 전쟁신에 가까운 묘사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고대 그리스 신전과도 같은 마리아의 공간에 들어오고 있으며, 그 발걸음은 미식축구의 태클 동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역동적이다. 비둘기로 묘사되는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도상학적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창공을 유영하는 천사들은 오히려 성령강림의 찬란한 영광을 가려버릴 정도로 유래없이 휘황찬란하다. 성모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결부된 베네치아의 민족적 자긍심이 그대로 전해지는 대작이다.
베로네세의 ‘레판토 해전의 알레고리’ 또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작품이다(그림보기). 하늘의 성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도움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성전에서 승리하였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도상은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다. 해상에서의 해전과 천국의 명확한 대비, 빛을 통한 두 세계의 결부, 세밀한 전투장면 묘사, 이 모든 것은 종교와 국가의 힘, 그리고 거장의 솜씨가 아니면 설명할 길 없는 인류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정수이다.
틴토레토의 ‘동물의 창조’는 거장의 솜씨가 빚어낸 판타지 세계에 대한 지극히 합당한 현시이다(그림보기). 초월적으로 나아가는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들이 모두 외편을 바라보며 구획을 갖추어 전진하고 있지만, 로마네스크나 비잔틴 시대에 나타나던 작위적인 구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미디어가 없던 시대의 당대 시민들의 눈에는 정말 납득 할 수 밖에 없는 창조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45점을 보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오래 서있으면 다리가 아플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이 아쉬웠다. 한 바퀴 더 돌고 싶었지만 다리가 버텨주지 못했다. 미술관람용 보조 다리 로봇이 조만간 등장할 것을 기대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국립신미술관은 건물 자체도 충분한 볼거리였다. 비정형의 금속과 유리 골조는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미래적 유기체 같았고, 가우디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만들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초 계획했던 무라우치 미술관은 시간과 체력 관계상 가지 못하고, 여기서 미술 여행은 끝이 났다. 가까운 거리에서 1개의 박물관과 3개의 미술관을 돌며 폭넓은 시대와 작가, 화풍을 경험했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퐁피두 센터의 포스트 모더니즘 작품들까지, 이번 여행에서 본 작가들만 나열해도 작은 서양미술사 한권을 쓸 수 있는 스펙트럼이었다는 점이 정말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