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 ‘장님이 된 삼손(The Blinding of Samson)’

1년 전, 독일 출장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슈테델 미술관에 들렀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미술관이었지만 피카소, 보티첼리, 드가, 모네 등등 많은 거장의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렘브란트의 ‘장님이 된 삼손’이다(그림보기). 원숙한 카이로스쿠로, 고통과 격정적 순간에 대한 포착, 갑옷에 반사된 생생한 빛과 질감의 표현, 이러한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차치하고, 나의 경험과 맞물려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나는 10살까지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살았었다. 20년 전이니 그 때 당시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유희라는 것이 ‘밖에 나가서 뛰어 노는’ 정도로 제한적이라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누구나 가난했던 그 동네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겨울에는 비료 포대 썰매를 타고, 공사판에서 폐자제들을 주워다 전쟁놀이를 하고, 눈오면 눈집 지어서 발이 얼도록 들어가 앉아 있는게 꼬맹이들의 일상이었다. 집에서는 컴퓨터도 휴대폰도 없을 때니 TV 혹은 책, 두 가지 콘텐츠 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집에 ‘성화도록집’이 있었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성서의 주요 내용들을 여러 명화로 보여주는 책이었다. 그게 왜 집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교회 지인에게서 얻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살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얻어온 책들이 집에 꽤 있었다. 도록집은 처음 집에 왔을때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내가 하도 자주 들여다봐서 나중에는 제본이 너덜너덜해지고, 하얀색 실밥이 여기저기 삐져나와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 책을 왜 그렇게 자주 넘겨봤는지 잘 모르겠지만, 언급한대로 즐길거리도 별로 없었고, 마땅히 읽을 책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컬러 책 자체가 드물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확실한건 그때도 그렇게 그림이 좋았고, 어린 나이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들을 찾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도 명화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누드에 상당한 관심이 갔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책에 있던 몇몇 작품들은 지금도 기억난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크라나흐와 반 에이크의 아담과 하와 그림이 있었고, 다 빈치의 수태고지, 렘브란트의 밧세바도 있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창조주 삽화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 렘브란트의 삼손이었다. 그렇게 고통에 대해서 강렬하게 표현한 그림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손의 일그러진 발가락의 주름만으로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이유가 있는 그런 작품이다.

그런데 20년이 지나서 그 작품을 우연히 슈테델에서 만났던 것이다. 거기에 그 작품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홀연히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그리고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컸다. 강원도 산골에 살던, 그 찢어지게 가난하던 집의 막내아들 꼬맹이가, 어느 덧 다 커서 만리 타국 땅에 홀로 서서, 도판으로만 보던 바로 그 작품 앞에 섰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들로 인해 공연히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작품 앞에 한참이고 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면서 망막 깊은 곳에 그림의 터치 하나하나를 집어 넣기 위해 애썼다. 코 앞에서 삼손의 고통과 절규를 함께 했다.

내가 앞으로 아이를 낳아서 기르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예술 속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건 좋은 것 같다. 강제할 필요는 없지만 손에 닿는 가까운 곳에 예술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교양이 있다는 건 나쁠 게 없다. 루브르 앞에 살면서 연간 이용권을 끊어 줄 수는 없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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