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파리에 가보지 못했다. 언젠가 가게 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루브르와 오르세에서 보내고 싶다. 정확히는 7대 3정도의 시간을 배분하고 싶다. 퐁피두센터는 왠만큼 긴 일정이 아니라면 가지 않을 것 같다. 아직은 아방가르드 앞에서 혼돈의 눈빛을 보이는 것이 두렵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오르세미술관전’이 열렸다. 휴가를 내고 평일 아침에 오픈하자 마자 입장했지만, 여유로운 관람이 될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무너졌다. 이렇게 미술애호가가 많은 줄 몰랐다. 아마 부제로 제시된 #이삭줍기, #밀레, #고흐의 네임벨류가 큰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해외 유명 갤러리의 특별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이틀에 내건 화가의 작품들을 기대하고 미술관을 찾지만, 정작 그 화가의 작품은 부제에 걸린 대표작 단 한 편에 그쳐서 쓴 웃음을 지으며 출구를 나서는 일이 잦다. 엄청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이라고 하는데, 도통 모르겠고, 구분도 안된다. 그러다 결국 주인공격인 그 작품 앞에 섰으나,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포진해 있는지라 관람객들의 뒤통수밖에 안보인다. 몇 년 전, 고흐의 ‘별이빛나는밤’을 부제로 내걸었던 인상주의전은 나에게도 그러한 쓴 웃음의 사례로 남아있다.
올해는 미술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품들의 사연은 모르겠고, 화가들의 이름은 대체로 익숙하나 르느와르, 쇠라, 세잔 정도의 시그니처가 아니면 여전히 도통 구분이 안된다. 애초에 작품들을 화가별, 사조별로 구분하면서 이해하려는 뿌리깊은 근대적,환원론적,현학적 가치관이 문제인 것이겠지.
어쨋든 이번 전시회의 네임벨류 마케팅은 기대감을 파괴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밀레와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들은 매우 비중있게 다뤄졌고, 각종 습작들이 더해져 이해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고흐는 단 두 점에 그쳤다.
전시는 사조에 따라 구획되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바르비종파와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순으로 이어지며 시대에 따른 화풍의 변화가 뚜렷하게 감지되었다. 작품 수의 비중으로 보면 인상주의가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내가 좋아하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실주의는 소수에 그쳐 아쉬웠다.
좋았던 작품은 윌리엄 부게로의 ‘포위’였다. 미녀와 푸토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피사로의 풍경화들도 아름다웠다. 평소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소실점와 원근법이 유난히 강조된다는 것을 느꼈었는데, 이번 전시회의 설명 문구 중에 빛에 대한 실험과 더불어 구도에 대한 탐구도 멈추지 않은 화가라는 설명이 눈길을 끌었다. ‘음… 나의 감상이 틀리지 않았군’ 이런 유치한 뿌듯함을 느끼며..
무엇보다 장 자크 에네르 라는 새로운 화가를 알게 된 좋은 기회였다. 한 작품, 독서하는 여인의 누드가 전시되었는데, 여지껏 보지 못한 몽환적이고 부드러운 질감이 마음에 들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 금방이라도 녹아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이 오래도록 눈길을 끌었다(그림보기).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수준 높은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기념품 수준도 높았고, 가격도 매우 저렴했다! 머그컵 하나에 6천원이라니! 카페에서 로고 박아서 파는 머그도 9천원이던데! 단, 예술 저변이 넓어진 만큼 이제 관람객을 위해 보다 전문적인 정보들을 제공했으면 좋겠다. 일본에서는 특별전마다 전체 작품 리스트를 문서로 제공하던데, 우리나라도 그런 걸 배웠으면 좋겠다. 사실 그냥 작품 번호 매겨서 화가, 제목, 연도, 재료 등만 적어 주면 되는 건데 전시와 작품을 상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런게 매우 유용한 정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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