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세잔, 그리고 에곤 쉴레

2016년 12월은 위대한 화가를 다룬 영화 두 편이 개봉했던 시기로 기억될 것 같다. 두 화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재구성했던 ‘현대미술의 아버지’ 세잔과 ‘빈1900’ 시대의 표현주의적 예술혁명의 결정체인 에곤 쉴레이다. 화가를 다룬 영화는 더러 있었다. 진주귀걸이 소녀, 데니쉬걸, 클림트 등 화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두지는 못할지언정, 어느 정도 고정팬은 확보하고 있다. 미술애호가, 미술전공자, 미술가, 예술에 대하여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 등… 그래서 종종 선보이고 있지만 이렇게 한 달에 두 편이 개봉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래서 열악한 상영스캐쥴에도 불구하고 두 편 다 개봉기간 내에 보겠다고 다짐했고, 성공했다.

나는 두 화가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기를 읽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근현대 미술의 위대한 금자탑을 이룬 화가들 답게 미술 관련 서적에서 그들의 이름을 찾는 것은 매우 쉽다. 특히 세잔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미술사학자들이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하고 있고,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미술의 대가들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미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문헌을 뒤적거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세잔에 대한 피상적인 캐릭터들이 나름대로 정립되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세잔은,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하여 매순간 붓을 놓지 않고 끝없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장인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과묵하고, 진중하며, 사과와 테이블보의 작은 배열과 각도 하나에도 신경증적으로 몰입하는 장인 중의 장인이었다. 이처럼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디테일한 시지각적 실험을 무수히 전개할 수 있었던 대가는 아마 외향적이기 보다는 내향적이며,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일 것 같았다.

(놀랍게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러한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크게 기여한 문헌은 미술사 관련 서적이 아니라, 본격적인 미술 지식을 다룬 서적으로는 보기 힘든 ‘명작 스캔들(장 프랑수아 세뇨 著)’이라는 책이었다.)

영화 속 세잔은 내가 가지고 있던 세잔에 대한 ‘편견’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존재였기에 상영시간 내내 약간의 혼란을 느껴야 했다. 내가 기대한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 내 눈앞에 실존할 때, 나의 기대불일치를 내적으로 조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아마 나의 얕은 지식 수준에 비하여 월등하게 오랜 시간 고증과 연구 끝에 창출되었을 영화 속 세잔의 캐릭터는 충동적이며, 열정에 불타오르다 못해 광기에 휩싸이기까지 한 저돌적인 천재 예술가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넝마에 가까운 옷을 입고, 제멋대로 수염을 기르고, 내면의 상처와 수치에 대한 방어기제로 친구와 동료들에게 서슴없이 언어 폭력을 퍼부어대는 안하무인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전혀 거리낌 없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내주지 않는 ‘나쁜남자’의 모습까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또 다른 천재인 에밀 졸라와의 지리멸렬한 애증에 가까운 우정을 보여주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은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며 두 사람의 미묘한 심리 변화와 갈등을 잘 잡아냈다. 실제로 그들이 어느 정도 가까웠고, 각자의 예술세계에 서로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두 천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예술의 깊고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을 것이라는 추측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에서 그려진 에곤 쉴레도 나의 기대를 무너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잔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면, 에곤 쉴레에 대한 기대는 불신으로 바뀌었다. 즉, “에곤이 저렇게 잘생기고, 저렇게 정상인일리 없다.”. 빈의 문화적 고양과 정치제도의 불일치, 실증주의적 과학기술혁명, 융합적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었던 살롱과 카페 문화, 무엇보다도 정신분석이라는 위대한 학문적 도약이 촉발시켰던 표현주의 미술 혁명 속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언어를 구사했던 에곤 쉴레. 특별히 그에 대한 전기나 소설을 깊숙히 파고들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 그는 음침한 성도착적 기질을 지닌 구부정한 천재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불안한 눈빛과 윤곽선, 일그러진 육체, 배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침전하는 인물,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특정 신체 부위에 대한 패티시적 집착 등은 그러한 캐릭터를 구축하기에 충분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영화 속 에곤 쉴레는 일단 너무 잘생겼다. 너무 잘생겼고 키도 크다. 가난한 예술가 답게 아무 옷이나 걸쳤는데 그냥 돌체앤가바나 컬렉션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다. 그리고 여인에게 한 없는 상처를 주지만 그 이전에 그만큼 충분한 사랑을 준다. 정말 스윗한 남자다. 그러다 보니 그의 성도착적인 시선은 그저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동물적이고도 순수한 사랑으로 희석된다. 물론 예술가의 성도착에 대하여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정신분석의 위대한 발견 속에서 촉발된 표현주의 예술혁명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과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다만 너무 기대와 다르게 멋진 인물이 그려지다 보니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는 그 정도…..

영화 속 천재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짜릿한 경험이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들과 호흡할 수 있다. 세잔이 피사로와 르느와르를 어떻게 펍에서 만났고, 어떻게 인사를 나눴는지, 베르트 모리조는 남성 중심의 화단에서 어떤 모습으로 돌아다녔고, 어떻게 스케치 했는지, 에곤 쉴레가 클림트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그림을 교환하고 고민을 상담했는지, 우리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영화를 통해 그려볼 수 있다. 비록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 다르더라도 아쉬워 하거나 불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모든 기대가 실제와 일치된다면 이 얼마나 재미 없는 인생인가. (적어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어줍잖은 문헌으로만 지식을 쌓은 나 보다는 그들이 훨씬 잘 그려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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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곤 쉴레’에는 체제시온(Secession)을 비롯하여 빈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실제 빈에서 촬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추억 속 장소인 카페 슈페를(Cafe Sperl)이 나와서 너무 반가웠다. 짧은 씬 이었지만 의자의 패턴까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 시절부터 그 모습으로 있었던 카페니 조금만 손보면 촬영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비포선라이즈의 전화 상황극 씬을 추억하며 그 자리에서 마시던 커피의 맛이 생생한데… 죽기 전에 다시 가 볼 수 있을까 ㅠ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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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예술가는 얼마나 많은 뮤즈에게 영감을 받고, 또 얼마나 많은 상처를 그들에게 주는 것일까? 모든 천재 예술가들은 걸작을 창출하기 위해 꼭 그렇게 여자들에게 상처를 줘야 하는 것인가? 그게 예술의 숙명인가? 난 안 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래서 내가 안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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