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데코의 여왕, 타마라 렘피카 展 (한가람미술관)

겨울방학의 한복판에서, 한가람 미술관은 오전 이른 시간부터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연휴가 끝난 첫번째 평일을 맞아 엄마 손 잡고 미술관에 나들이 온 아이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인증샷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 많은 아이들을 흡수한 전시는 1층의 오르세미술관 전이었다. 알폰스 무하 전이 열리고 있는 2층은 너다섯명 남짓 되는 청년들만 서성거리고 있었고, 3층 타마라 렘피카 전에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착석한 관계자 외에는 나 뿐이었다. 어제 르누와르 전에 이어서 오늘도 1등으로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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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1등으로 입장할때마다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아무런 관람객이 없는 상태에서 어떠한 시지각 계통의 외부개입도 없이 공간 속에 오롯이 작품과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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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본 그녀의 작품은 매우 독특했고, 그 이미지가 여러 갈래로 차용되어 왔다는 것을 금새 알아챘기에 이미지 자체는 익숙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정확하게 외우지는 못했다. 아니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국적을 유추하기 조차 어려운 그녀의 이름이었지만 언젠가 찾아볼 아티스트 중 하나로 각인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전시에 대한 광고를 논현역 부근 빌딩 전광판 광고로 봤을 때 주저없이 얼리버드로 예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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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품은 예상했던대로 나의 취향에 잘 맞았다. 관능적이고 과장된 육체, 금속을 연상케 하는 인물의 양감, 비현실적인 육체를 타고 흐르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섬세한 음영,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 눈을 반 쯤 뜬 여인들이 화면을 압도하고 있었다. 특히 잘 깎아서 꼼꼼하게 니스를 발라 놓은 것 같은 손가락 표현은 손으로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했던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다소 왜곡되어 삐뚤삐뚤 꺾여 있지만 여인들의 손가락은 감정이 거세된 기계적인 인물들의 유일한 소통 창구처럼 보였다. 여인들뿐만 아니라 <세인트 안토니(1979)>도 그랬다(그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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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티를 타고 있는 자화상(1929)>에서는 화가의 자신감이 엿보인다(그림보기). 이제 전성기의 한 가운데에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한 눈에 받는 그녀의 충만한 자의식이 화면을 뚫고 나온다. 직선적이면서 사선의 구도는 거칠 것 없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질주하는 그녀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반쯤 감은 눈은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으며 관능미의 표상으로서 작용한다. 스스로 핸들을 움켜쥐고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로서의 자아가 날카롭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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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인물들의 시선 처리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기하학적인 도시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인물들은 화가 본인 처럼 반쯤 뜬 눈으로 외부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반면 그들의 관능적인 육체는 관람자를 향해 있다. 시선과 육체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고, 에로티시즘에 매혹된 관람자는 인물과 눈을 마주 칠 수 없기 때문에 관음증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언제 그림 속 인물이 눈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함에 노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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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데뷔 전 습작들, 정물, 악세서리 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나 아쉬움은 남았다. 기하학적 구, 원기둥, 원뿔로 치환된 인물의 곡선에서 섬세한 붓터치를 느끼고 싶었으나 유화 작품이 많지 않았다. 대표작들은 대체로 실크스크린이었고(애초에 원본이 실크스크린인 것인지, 실크스크린 형태로 나중에 제작한 것인지는모른다.), 유화 작품으로 출품된 작품들 중 상당수는 레플리카(화가 자신의 리바이벌인지, 타인의 보존을 위한 모작인지는 모른다.)였기 때문에 ‘오리지널 유화’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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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구내식당에서 6,000원 짜리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8,000원짜리 카푸치노를 마시다 보면 현대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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