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아워스(Museum Hours, 2012)

빈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하나는 내 인생 영화인 비포 선라이즈이고, 다른 하나는 뮤지엄 아워스이다. 두 영화가 바라보는 빈은 같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가 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의 빈은 이상화된 공간이다. 그곳은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인 빈이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고풍스러운 멋과 약간은 빛 바랜듯한 청춘의 아련함, 그리고 풋풋한 에로티시즘까지 곁들여진 판타지적 공간이다. 100년은 족히 된 카페에서는  젊은이들이 밀담을 나누고, 알베르티나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오페라 하우스는 지금 당장 사랑에 빠질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뮤지엄 아워스에서 보여주는 빈은 차가운 도시다. 물론 오래된 아파트들은 정갈하고 아름답지만 인적이 드물고 회색조가 강해 스산한 느낌을 준다. 앵글은 의미를 찾기 힘든 대상을 집요하게 비추고 가끔은 당혹스럽게 가까이 다가간다. 예를 들어 차가운 겨울의 아스팔트 위에서 빵쪼가리를 뜯고 있는 비둘기라던지, 갈 곳을 잃어버린 듯 우둑커니 앉아 있는 꼬마라던지, 얼어 붙은 실개천 같은 것들을 비춘다. 나이듦, 외로움, 여행지의 고독, 궁핍 등 주인공 앤과 연관되어 있는 관념들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가 빈에서 기대했던 그것이 아니다. 벨베데레 궁 잔디밭에 앉아서 셀카봉을 휘두르고 싶었던 바로 그 빈이 아닌 것이다.

영화는 빈의 이상화되지 않은 도시적 풍경과 미술관의 단조롭고도 조용한 일상을 대조시킨다. 그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도시와 미술관에서 완전히 달라지는 톤에 의하여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지리한 심리 드라마와 미술 관련 BBC 다큐멘터리를 동시에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두 장르의 영상 매체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안내원 역할을 하고 있는 요한이다. 그는 박물관에서 안내원 역할을 수행하듯, 앤에게 친절한  도시 안내자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후자의 역할에 좀 더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공연한 시간 때우기로서의 유희 내지는 일상의 자극제 인지 알 수는 없다. 영화는 그러한 모든 판단을 관객에게 유보하고 있다.

이 두 영화에서 빈을 다루고 있는 방식을 대조해 보는 것은 재미있다. 같은 도시이지만 전혀 다른 톤으로 그려지는 빈은 각각 그려지는 방식에 의거하여 인물들이 처한 드라마를 매우 효과적으로 부각시켜준다. 이러한 효과의 발현은 아마 이 도시의 태생적 매력 때문일 것이다. 정말 타고나게 잘생긴 사람은 거지 컨셉이던, 댄디 컨셉이던 다 잘 어울리는 법이니까.

뮤지엄 아워스의 독특한 장면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느닷없이 관람객들이 누드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미술관과 도시를 계속 넘나들던 화면 속에 여느 때처럼 미술관을 조용히 비추는가 싶더니, 여성 관람객 한 명을 비추는데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는 시선은 그녀가 완전한 누드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관람객도 천연덕스러운 전라의 상태로 화면에 포착된다. 지극히 리얼리티를 추구했던 화면 속에서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전라의 관람객들을 비추니 꽤 큰 혼란이 찾아온다. 이토록 엄숙한 곳에서 갑작스러운 누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중에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작품들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성서의 제재를 다루고 있지만 육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한 그런 작품들, 그런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앞에서 키득거리고, 요한 본인도 가끔 낯부끄러울때가 있다고 말한다.

아마 전라의 관람객들은 그 나래이션과 대응되는 장면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근엄한 그림 속 누드에 당황스러운가? 그럼 이건 어떤가? 세계 최고 권위의 박물관을 유유자적 전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운가? 하지만 너도 이런 상상 한번쯤 해봤을걸? 가장 권위있고 교양있는 장소에서 전라가 되는 상상 말이야! 이런 식으로 사고의 흐름을 유도하는 것 같다. 이걸 육체에 대한 권력과 담론에 대한 논의로 풀어내기에는 아직 푸코에 대한 나의 이해가 부족해서 여기까지….

둘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데, 도시 속에서 걸어가는 한 노인의 뒷 모습을 나래이션 하는 것이다. 그 나래이션은 익숙하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중간중간 들려주는 미술사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의 그것과 정확히 같은 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나래이션이 아니라 큐레이션이다. 이 장면에서 심지어 화면의 앵글도 축소하면서 빈의 도시 정경을 마치 캔버스에 집어 넣은 것처럼 묘사한다. 이는 미술관 안에서 작품들을 보여주고 설명해 주었던 방식을 실제 우리가 (아니, 빈 시민들이) 살아가는 공간 속의 일상적인 장면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술관과 삶의 터전 간의 간극을 극복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삶의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도 예술적 가치들을 스스로 발견해보는 훈련을 해보라고 권면하는 것 같다. 내가 보여준 빈이 비록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거기에 또 다른 삶의 정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화는 타지에서 처한 고독, 궁핍, 상실과 그것을 감싸주는 선량한 이웃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극적인 서사도 없고 갈등도 없다. 인류가 발굴해낸 최고 수준의 교과서적인 아름다움과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이 공존하는 것을 가치중립적으로 보여준다. 아마 이 영화는 박물관에 소장된 아름다움이 비단 박제된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요한으로 대변되는 위로와 평화는 박물관에도, 그리고 눈 내리는 차가운 길 위에도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

오랜만에 미술사 박물관의 내부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니 빈에 가고 싶다. 또 가고 싶다. 미친 듯이 가고 싶다. 알베르티나도 못 갔고, 레오폴트도 못 갔다. ㅜ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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