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Peggy Guggenheim: Art Addict, 2015)

전설로 남은 미술 수집가, 후원자이자 갤러리 오너였던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예술에 대한 탁월한 열정과 안목, 그리고 약간의 재정적 배경이 뒷받침 될 때, 한 사람의 예술 수집가(후원자)가 어떻게 미술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작품을 이끌어 가는 것은 페기 구겐하임과 그녀의 마지막 전기 작가 간의 대화이다. 여기서 나래이션으로 사용되는 작가와 페기 간의 인터뷰 녹취음원은 오랫동안 분실된 상태로 있다가, 감독이 작가의 집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기적적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아니, 그럼 애초에 이 녹음파일 없이 어떻게 다큐멘터리를 찍으려 했던 거지? 그냥 주변인 인터뷰로만?) 어쨋든 감독에게 있어서 이 발견은 신의 한 수 였을 것이다. 그 덕분에 페기 할머니가 자기의 파란만장한 삶의 무용담을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에게 허세어린 목소리로 들려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구성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다큐멘터리다. 페기와 작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화면에는 당대의 사진과 영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생존해 있는) 페기의 지인들이 부가적인 증언을 덧붙힌다. 물론 뒤샹, 폴락, 미로, 에른스트 같은 당대 예술가들은 현 시점에 아무도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페기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지인들의 경험은 청년기에 잠시 그녀를 마주쳤던 단편적인 추억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영상의 형태로 그 증언들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후대에는 미술사적 자료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페기에 대한 시청각적 자료를 집대성한 ‘미술사적 아카이브’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미술사에 있어서 후원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거리에서 돌을 쪼던 석공의 아들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집으로 들인 로렌초 데 메디치, 살인과 폭행으로 점철되어 도망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카라바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델 몬테 추기경은 후원자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후원자는 예술가를 발굴하기도 하고, 실패로 부터 구원하기도 하며, 작품의 방향을 설정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기의 사례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후원자가 지녀야 하는 덕목을 보여준다. 페기는 전운이 감도는 1939년의 파리에서 하루에 하나의 작품을 수집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에른스트, 피카소, 브랑쿠시 등 당대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과 관계를 맺고 소중한 컬렉션을 확장해 나간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이름 조차 예술적인 <The Art of This Century> 라는 갤러리를 만들고 칸딘스키, 호안 미로, 잭슨 폴락, 마크 로스코 등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틀을 만들어나간 예술가들의 개인전을 지원한다. 삼촌인 솔로몬 구겐하임의 갤러리에서 목수로 일하던 폴락을 발굴하고 온갖 혹평에도 불구하고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자랑스럽게 자인하는 인생 최대의 성과로 남았고, 물론 미술사의 찬란한 한 페이지에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족적으로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페기와 화가들의 섹시한 에피소드에 과도하게 치중했다면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지적 즐거움을 선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에피소드들을 모두 배제한다면 대중적인 유희를 줄 수 있는 상업용 콘텐츠로서 인정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가십걸(?), ‘셀레브러티로서의 페기’와 ‘미술 애호가이자 후원자로서의 페기’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녀가 왜 가족으로부터 받은 아픔과 상처를 예술로 치유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의 남성편력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렇게 재미있는 작품은 아니다. 미술사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봤다.

현대미술은 어렵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언제나 진리다. 만약 페기가 뒤샹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예술적 안목을 기르지 못했다면? 그래서 영국에서의 첫 번째 화랑이 완전히 망하고 그녀의 이름이 미술사에서 사라졌다면? 그래서 폴락이 데뷔하지 못했다면? 이런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은 흥미롭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가 타이타닉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것 조차 미술사의 이정표 중 하나가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이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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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찰리한 작가의 라이브러리톡이 이어졌다. 교포 출신이시라 그런지 그다지 달변은 아니었지만 전문가 답게 좋은 정보를 하나 던져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아시아프(ASYAAF)’ 라는 청년(졸업생) 연합 전시회에 꼭 가보라고! 그래, 올해 행사는 꼭 가봐야겠다.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Peggy Guggenheim: Art Addict, 2015)”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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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 ㅎㅎ 이 작품 흥미롭네요.

    영화 카테고리에서 미술 관련 이외의 것에는 영 관심이 가지 않아서 라라랜드 빼고는 스킵했어요.

    일전에 편식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ㅎ 이 카테고리에서 전체적인 글을 읽어 보니, 그 의견에 지금은 동의합니다.

    블로그 글 중에 관심있는 것은 거의 다 읽었는데 한권의 책 읽는 느낌이었네요. 그동안 잘 읽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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