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공부의 궤적: 어떤 책을 읽었나

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관련 도서들을 읽기 시작한지 1년이 조금 지났다.

애초에 거시적인 로드맵을 수립하고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던만큼, ‘공부’라는 거창한 단어로 그 과정을 미화하는 것 조차 과분해 보인다. 그저 한 권의 책을 읽고, 거기서 느껴지는 지적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또 다른 한 권을 읽고, 또 다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책을 찾아 나섰던 나선구조일 뿐이었다.

그 지극히 개인적인 궤적을 기록한다.

 

1. 미술사

말그대로 ‘미술사책’을 가장 먼저 읽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 위해서는 사전 정보들이 필요했다. 예술작품에 대하여 지적인 방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아무런 지적 배경이 없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구 역사의 지배적 담론과 권력 구조 속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의 규준(canon)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감동의 방향과 질을 통제한다. 누군가는 사회의 구조적 담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서양미술사를 읽기 시작했다. 물론 서양에 살고 있는 그들은 그냥 ‘미술사’라고 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러하듯 곰브리치 선생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다(yes24 링크).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이 책의 가치를 몰랐다. 본격적인 첫 독서였으니 사전에 비교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한데, 당시 나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지금 지식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안목은 있다. 예술에 대한 안목이 아니라, ‘미술에 관하여 쓴 책’에 대한 안목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 책이 왜 클래식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곰브리치 미술사는 그야말로 문장 하나 하나가 잘써졌고, 번역도 훌륭하다. 예술, 그리고 그것을 품은 시대에 대한 대가의 통찰력이 묻어나며, 한 평생을 내던진 그 찬란한 미술의 세계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묻어나서 더욱 좋다.

어차피 한 권의 책으로 예술의 모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본질에 집중한다. 시대의 본질, 사조의 본질, 화가의 본질. 그 본질이 분절되지 않고 내러티브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다. 물론 그가 적시한 것이 본질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매우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그게 진실에 가깝다는 확신이다.

이후 관점을 확장하고 싶어서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읽었다(yes24 링크). 하지만 잰슨을 먼저 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잰슨의 책은 모든 것을 망라하려고 하지만 결국 겉핥기 식으로 지나갈 수 밖에 없다는 슬픔을 느끼게 한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다 읽으면 서양미술의 모든 정수를 맛본 것 같은 착각이 들겠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지적 공허함은 아마 더 커질 것이다. 그래도 시대별, 유형별, 작가별로 정리하는 방식은 초심자에게 있어서 더 없이 친절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교과서의 구성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잰슨의 미덕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서양미술사는 어떨지 궁금해서 진중권의 미술사를 읽었다(yes24 링크). 그의 대표작은 미학 오디세이이지만, 이 미술사도 나름대로 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고전예술,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단순히 시대로만 놓고 보아도, 고전예술은 기원전 그리스,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인상주의에 이르는 4천년이 넘든 시간인데(알타미라는 지겨우니 제외하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고작 10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다. 물론 최근의 시대상황은 훨씬 변화가 빠르고, 양식도 다변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짧은 시간의 흐름을 세 권 중 두 권으로 편성한 것은 이 시대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이 책은 곰브리치와 잰슨의 책에서 다소 언급이 부족했던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사에 대하여 더 깊게 알고 싶은 사람에게 유용한 책이다. 그리고 저자의 장기를 발휘하여 역사의 중간중간에 미학적 접근을 덧붙이는 관점도 유용하다. 그래도 고전예술의 분량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남는다.

서양미술사를 계속 읽다보면 애초에 서양사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서양미술사에 접근했다는 것 자체가 회의로 다가온다. 곰브리치나 잰슨은 모두 서양의 문맥 속에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태어나서 눈도 뜨기 전에 어미의 젖에 입술을 대듯, 삶의 궤적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자들이라는 얘기다. 그들의 책은 애초에 서양에서 태어나고 서양의 땅에서 자란 동식물을 소화한 저자와 수용자를 상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애초에 그 곳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편타당한 공감대에도 제한적으로 동조한다. 거기에서 서양사 혹은 세계사적 지식의 필요성이 야기된다.

그러한 필요성에 따라 매리 홀링스워스의 <세계 미술사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yes24 링크). 이 책은 크기와 분량에 비하여 정말 싸다(심지어 나는 중고로 샀다…). 우리는 비싼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을 주저하지만, 반대로 너무 싼 책에 대해서는 그것이 담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가치에 대하여 불손한 의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우려와는 달리 나름대로 충실한 책이다. 책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 미술에 중점을 둔 주요 지점들을 배열한다. 그래서 세계사와 미술사의 접점에 대하여 균형잡힌 서술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세계사 연표 속에 미술사적 사건들을 꼼꼼히 기록하여 통시적 흐름의 선후 및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때 수시로 참고하기 좋다. 책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 사건들의 언급은 표제의 수준에서 그칠 정도로 피상적이긴 하지만, 어차피 한권의 책에서 세계사와 미술사를 완벽하게 교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다. 필요한 부분은 스스로 찾아서 더 깊게 발굴해 나갈 수 밖에 없다.

 

2. 도판별 접근

다양한 서술들을 통해 통시적 역사의 흐름을 조망해 나가다 보면 활자에서 벗어나 더 많은 작품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미술사책들이 제시하고 있는 도판들은 그 시대를, 지역을, 사조를, 화가를, 대표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것들이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강력한 규준이 창작자, 수용자, 후원자의 관념을 통제하고 있던 시대와 지역이라도 그 안에는 통념을 벗어나는 다양한 미술적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한 명의 화가가 걸어온 삶의 궤적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창작활동이 가능했는지를 다빈치, 뒤러, 그리고 피카소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많은 도판을 보고 싶어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을 읽었다(yes24 링크). 이 책을 ‘읽었다’는 표현 보다는 그저 ‘봤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책에는 고대 벽화에서 부터 컨템포러리 아방가르드를 포괄하는 1001점의 명화가 시대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간혹 ‘왜 이 작품이 배제되었지?’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편집자의 의도가 모든 독자를 납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술사 교과서에서 빠진 더 많은 대표작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존재목적은 독자 전용의 아카이브로서의 역할이다. 시대순 정리와 화가별 색인을 통해 특정 화가나 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발생했을 때, 시대 순으로 선후관계가 혼란스러울 때, 특정 작품을 누가 그렸는지 헛갈릴 때 등 언제나 가까운 곳에 놓고 수시로 참고하기 좋다. 또한 미술사에서는 간과되어 있지만,  내 취향에는 꼭 맞는 화가를 발굴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책을 역사책 읽듯이 선형적으로 앞에서부터 쭉 읽어나가려는 생각은 좌절을 야기할 것이다. 이 책은 작품들에 대한 큐레이팅의 모둠일 뿐,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미술사방법론

미술사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역사적 흐름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그리고 미술에 대하여 뭔가 아는 척하면서 당당하게 분석하고 싶은데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럴때 필요한 것이 미술사방법론이다. 미술과 미술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들은 미술 자체에서 기인한 것도 있지만 미술 이외의 사회, 과학, 심리, 기호 등 분야의 이론에서 차용된 것이 더 많다. 따라서 미술사방법론은 미술을 둘러싼 보다 포괄적이고 풍부한 담론들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 관련 도서들은 별도로 기술했던 바가 있다(‘미술사 방법론’ 입문서들에 대한 소론). 미술을 둘러싼 담론과 관념의 세계에 관심을 둔다면, 미술에 대한 아는 척은 훨씬 풍부하고 권위를 갖출 것이다.

추가적으로 미술사방법론이라는 학문적 수준의 단어로 정리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세계 명화 속 숨은 그림 찾기>라는 책도 읽어볼만 하다(yes24 링크). 이 책은 명화 속에 나타난 여러 시각적 모티브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준다. 그렇기에 파노프스키의 도상학 및 도상해석학적 관점이나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에서 아주 낮은 문턱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미술 속에 특정 시대, 민족, 종교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양미술의 소재는 고전고대의 모티브와 종교적 교리(혹은 전설)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이 그림의 메시지를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서양미술 주제의 최고 원천인 <성서>, 오이디우스의 <변신이야기>, 기타 각종 역사서와 성서 외경, 카톨릭 전설 등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도상학적 이해를 위한 기본적인 배경지식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입문자용이라 그런지 아이콘의 종류가 그다지 풍부하지는 않다.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할 필요는 없는데…

 

4. 화가

미술사를 공부하다보면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화가들이 발굴된다. 그러면 해당 화가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도록집, 전기, 자서전 등을 읽고 싶게 마련이다. 미술책은 기본적으로 단가가 높은 반면 독자들의 지적.문화적 허영심을 교묘하게 충족시키는 특성이 있어 꾸준히 잘 팔린다. 그래서 출판사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쏠쏠한 시장인 모양인데, 우리나라에도 특정 화가와 관련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화가에 대한 책은 가급적 읽어보고 사거나, 최소한 독자 서평을 확인하고 사는게 좋다. 시중에 해당 화가의 마니아들을 우롱하는 함량 미달의 번역서가 많기 때문이다. 직역 수준의 번역서를 읽노라면 차라리 영어사전을 펼쳐 놓더라도 원서로 읽는게 낫겠다는 회의가 들것이다. 나에게 그런 실망을 안겨준 책은 <에드워드 호퍼>였다(yes24 링크).

 

5. 관점 취하기

미술사의 여정을 계속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흥미있는 이론이나 관점에 끌리게 마련이다. 미술의 역사를 속에서 변화의 흐름을 주도한 동력은 무엇이었나? 미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또는 미술과 그것을 둘러싼 관념의 세계를 어떻게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 사회.정치.경제 이론과는 어떤 관련성을 맺는가? 후원자.수용자.비평가의 영향과 역할은 어느 정도인가? 등 다양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심화된 독서가 필요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답을 찾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들어, 나는 최근에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읽으면서 섹슈얼리티, 젠더 관점의 지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yes24 링크). 푸코를 계속 읽다 보면, 기존에 우리가 부지부식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통념들을 뒤집기 위한 그의 노력에 감탄을 보낼 때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모든 서술의 노력─문장이 끝날 것 같지만 끝나지 않으며, A를 납득시키는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는 A가 아닌 B를 받아들여야 될 것이라며 뒤통수를 치는 등의 반전, 그리고 지금 내가 따라하고 있듯, 끝나지 않는 문장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부연설명하기─들이 결국 ‘반론을 위한 반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권력과 담론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제로베이스에서 관념의 원천까지 도달하려는 집념은 그가 왜 위대한 사상가로서 계속 인용될 수 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전에는 미술에 대한 ‘지각-인지-감정’ 차원의 메카니즘에 관심이 생겼었다. 이 방면에 있어서 에릭 캔델의 <통찰의 시대>는 매우 뛰어난 뇌과학적 학식과 예술적 애정을 보여준다(yes24 링크). 이 책은 뇌과학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한, 말그대로 정점에 위치한 석학으로서 저자의 지식과 출신지역인 빈의 미술에 대한 애정을 담뿍 녹여 낸 다학제적 연구의 종합적 성취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빈의 1900년이 과학사 및 예술사에서 왜 그토록 탁월했는지, 그리고 과학.의학.예술.철학의 다학제적인 발전 속에서 어떠한 위대한 성과들이 발현된 것인지 효과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어 코코슈카 등 ‘빈 1900’ 미술가들의 작품을 정신의학 및 과학기술의 발전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까지 미술 감상의 시야를 넓혀주는 소중한 지적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곰브리치 선생님이 단순히 미술사 교과서 저자가 아니라 미술의 시지각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성과를 창출한 장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술에서는 벗어나지만, 이 책을 통해 뇌과학, 인지과학 등에 관심이 생겼다면, 해당 분야에서 그야말로 끝까지 달려가는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yes24 링크).


그 후의 이야기,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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