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이미 고전이 된 진중권의 저술이다.

무엇이 고전을 만드는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저자가 어렵고 막연한 관념의 세계를 다수의 대중에게 쉽게 이해시키도록 노력했던 점일 것이다. ‘미학’이라는 철학의 물줄기 하나를 끄집어 내어 관념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계보를 보여주고, 실질적인 작품의 사례 속에서 납득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은 응당 존중받을만 하다.

이 책과 관련한 어떤 인터뷰에서 저자는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고,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쉽고 재미있는 책을 쓸 수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즉, 배움의 과정은 재미있었으나, 스스로도 이미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닌 상태에서 썼기 때문에 저자의 지적 즐거움이 활자를 통해서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공감가는 까닭은 ‘나의 즐거움이 곧 대중의 즐거움’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나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때, 그리고 대학교때 교회에서 공연할 연극의 각본을 쓴 적이 몇 번 있었다. 수고스러움을 무릅쓰고 각본을 써야만 했던 이유는, 이른바 성극(聖劇)이라는 카테고리로 기존에 공개되어 있는 작품들이 대체로 너무나도 교훈적인 메시지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어서 마음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대단히 폐쇄적인 사회집단 내에서 보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기준의 끝까지 가서, 전체 행사의 주제에 부합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예  직접 쓰는 수 밖에 없었다.

각본을 쓰다보면 본능적으로 안다. 이 씬이 재미있을지 없을지. 왜냐하면 그것을 쓰고 있는 내가 이미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씬을 쓸때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엉덩이가 아픈줄도 모르고 쭉쭉 써내려갈 수 있었다. 그런 씬은 연습할때도 재미있고, 무대에서도 성공적으로 연출된다. 반대로 스토리를 짜맞추기 위해 어거지로 써 넣은 부분은 연습할 때 이미 삐걱거리면서 티를 낸다. 그래서 연습 과정에서 출연진들의 집단지성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각색되기 마련이다.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골방에 쳐박혀서 혼자 가슴벅차하면서 이 글을 써내려갔을 저자가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아마 스스로 재미를 느끼면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심리적 구조 속에 가장 큰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는 ‘나르시서스’일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명시적인 텍스트로 풀어내면서 시지각으로 재확인하는 것은 그 지식의 원천이 되어준 수많은 고전의 저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지적으로 사고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명민한 나 자신의 의식을 재확인하고, 그 의식과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내밀한 즐거움일 것이다. 저자의 그런 즐거움과 진정성은 솔직하고 격의 없는 문체 속에 생명력을 발산하며 명백히 묻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오랫동안 사랑받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석사학위를 갓 취득하고 유학준비하던 청년이 미학이라는 고도의 지적이고도 관념적인 영역에서 이 정도 수준의 길라잡이를 제시할 수 있다는게… 어쩌면 부러운 것은 그의 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연구하고, 그 지식을 응집시킬 수 있는 ‘어떤 주제’를 그 당시에 이미 발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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