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F. Young의 「메디치(The Medici)」

미술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젠가 꼭 메디치 가문의 역사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술사의 위대한 변곡점마다 등장하는 그 이름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궁금했다. G. F. Young 이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00년 전에 쓴 이 책을 통해 그 모든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물론 그 가문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예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넉넉한 후원을 빼놓을 수 없기에 상당수의 지면은 미술사의 위대한 순간들과 메디치 가문의 접점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자의 무게 중심은 이 가문의 찬란했던 여정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데 있으며, 미술에 대한 후원, 그것을 통해 탄생한 역작들, 문예 전반에 걸친 파급효과 등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작은 꼭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하나 없이(다행스럽게도 책 중간에 컬러 도판이 네다섯장 정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670페이지의 장대한 지면에 깨알같이 아로새겨진 가문의 일대기에는 찬란했던 미술사의 명장면들이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으며, 설령 그 이야기가 없을 지언정 세계사적 소양을 쌓고 있다는 뿌듯함을 안겨준다는 미덕은 그다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메디치 가문에 관하여 매우 호의적이다. 가문의 일원에 대한 평가를 내릴때마다 스스로가 객관적, 중도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 스스로 객관적, 중도적이라는 강조를 반복하면 할수록, 정말 그런 것인지에 대한 독자의 의심은 커지게 마련이다. 나 같은 의심 많은 독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저자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자주 나열하며, 그러한 비판이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온당치 않은지를 논박한다. 물론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의 평가를 두루 살펴보면서 종합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려는 자세, 그리고 현재의 눈이 아닌 해당 인물이 실존했던 시대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저자의 자세는 마땅히 존중받을만 하다. 하지만 저자가 “이러한 평가는 그야말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가끔은 마음 속 깊이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의 해당 분야의 지식이 워낙 해박하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문헌들을 검토했던 노력과 열정이 페이지 곳곳에 역력히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냥 “아 물론 그러시겠죠…” 하고 믿는 것 뿐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한 덕목과 준비물이 있다. 우선, 너무나 생소한 유럽 전역의 지명들과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동명이인들이 등장하는 까닭에 충분한 인내심과 기억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스마트폰, 혹은 PC를 곁에 두고 읽어야 한다. 많은 건물, 회화, 조각, 지명이 등장하고 구체적으로 해설을 해주기까지 하지만 정작 도판은 없기 때문에 그때그때 검색을 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도판이 들어갔다면 800페이지를 족히 상회하였겠지만, 친절하게 모든 것을 떠먹여주는 최근의 책들과 비교하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애초에 어떻게 그 모든 지도력과 후원이 가능했을 정도로 그들에게 막대한 부가 있었냐는 것이다. 이 책은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출발점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부터 가문의 피, 재산, 역량이 후대로 이어져 내려가는 것을 보여주지만, 조반니 이전에 은행가 가문으로서 부가 어떻게 축적되어 있었던 것인지까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아마 이 부분은 저자에게 관심 밖이었거나, 자료가 없거나, 전공분야가 아니었던 모양인데, 경제사적 관점에서 추가적으로 탐구해보아야 할 것 같다.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한 가문의 역사서로서 이 정도 미려한 서술로, 풍부한 지식과 읽는 재미가 조화를 이루면서 꽉 짜여진 책은 드물 것이다. 특히 메디치 가문을 둘러싼 유럽 전반의 정세를 보여주고, 그 안에서 다시 가문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구성은 세계사, 종교사, 미술사적 지식을 아우를 수 있는 유쾌한 지적 경험을 선사한다. 소설이 아닌 역사서임에도 한 가문의 흥망성쇠에 동화되어 함께 가슴조리고, 통쾌해하고, 애잔함을 느끼게하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다. 르네상스와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 그리고 15~17세기의 격동기 유럽에 대해서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권장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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