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마술사, 에셔 특별展(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이번 에셔 전은 홍보가 미진한 것 같다.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우리나라에서 에셔의 인지도가 낮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그가 지닌 독자성과 중요도를 생각할 때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도 7월 말에야 에셔 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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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셔의 개인전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열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일지 모른다. 착시를 부르는 그의 신기한 그림들이 흔한 “인터넷 짤” 처럼 커뮤니티에 돌아다닌 적은 있지만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생소할 것이다. 흔한 미술사 교과서 하나를 집어들어도 그의 이름을 찾기는 힘들다. 이번 전시의 설명문에서는 그가 워낙 독자적인 미술세계를 추구했기 때문에 주류 미술계에서 그를 암암리에 배척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본인 스스로 미술계에서 그렇게 유명해지거나 파란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새로운 시각적 환상들을 만들어 내는일에 큰 흥미를 느끼며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말 그대로 즐기면서 작품활동을 한 것 같다. 큰 틀에서는 유사한 주제이지만, 세부적으로는 매번 새로운 개체들을 동원하면서 시지각의 유희를 창출해왔고, 그 과정에서 충분히 예술가로서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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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내가 에셔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통해서 였다. <미학 오디세이> 1권은 에셔에게 헌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모티브들을 미학의 개념들과 병치시키면서 이해를 돕고 화두를 던지는 구성이 인상적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에셔 작품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번 전시에 출품되었다. 이토록 많은 대표작들이 우리나라까지 친히 왕림하여 주실 수 있는 까닭은 역시 판화라는 제작 기법의 장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전시회에서 판화 작품을 볼 때 마다 하단의 “몇 분의 몇” 숫자를 보며, 유일한 예술 작품으로서의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판화가 아닌 일반 드로잉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위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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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직전에 블라맹크 전을 보고 온터라, 작가의 터치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물론 느끼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분명 도판에서 보는 것 보다는 감동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현장에서 더 몰입해서 보니 새로운 디테일들이 보였다. 특히 테셀레이션 파트는 보면 볼수록 경이로웠다. 어떻게 저렇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화면을 채울 수 있는지 절로 감탄이 나왔다. 타고난 사람이 즐기기까지 할 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외곬수적으로 보이는 그가 퍼즐을 맞추듯이 진기한 개체들을 이리 저리 맞추다가 드디어 빈 공간을 최적의 개체로 채우는데 성공했을 때 혼자 얼마나 뿌듯해했을지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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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에서 소개된 에셔의 작품들은 미학의 개념들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평범한” 풍경화나 정물은 배제되었었다. 그렇기에 에셔의 풍경화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는데, 그에게 바쳐지는 헌사는 기하학적인 착시, 수학적 원리의 적용, 온갖 시지각적 환상들에 국한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석판화 혹은 목판화로 이토록 섬세한 선들과 손에 잡힐 것 같은 양감을 표현 할 수 있는지… 그 숙련된 기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최고 명문 미대에서 연필 드로잉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을 데려와도 저렇게는 못 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매우 창조적인 발상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를 한 사람의 예술가, 대가로서 완성해 준 것은 섬세한 표현력이다. 마치 체력 훈련을 등한시하고 발재간만 익힌 축구선수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없는 것처럼, 위대한 예술가가 지닌 내면의 천재성도 손 끝에서 물리적으로 실현 되어야만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에셔는 내면의 천재성과 손 끝에서 발현되는 기술을 모두 최상급으로 갖춘 드문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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