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 회화적 표현의 심리학적 연구(1989)」

미술사의 관문에 피해 갈 수 없이 우뚝 서 있는 곰브리치 선생님의 명저 중에서도 손꼽히는 책이다. 실제로도 <미술사를 만든 책들> 16권 중 하나로 당당히 선정되어 있는 책이다(물론 여기에 선정되었다는 것이 명저임을 공식 인증 받은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려운 편이다. 미셸 푸코를 난이도 10으로 놓고 봤을 때, 7정도는 된다. 이러한 어려움은 서술방식이나 관념적 내용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번역 상의 문제라고 판단된다. 내가 읽은 버전은 1972년 개정판을 1989년에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원서의 초판이 1959년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어려움은 납득이 간다. 저자 본인이 딱딱한 학술적 서술 보다는 유려하게 이어지는 ‘준-구어체’를 추구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문장의 평균 길이가 길고 서술구조가 복잡하여 번역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다 번역 시기가 지금과 30년 가까이 차이가 나므로 구석구석 아주 미묘하게 구태의연하며,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문장 구조 및 어휘가 곳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렇듯 매끄럽지 못한 문장을 번역가의 자질 문제로 귀결시키는 것은 그에게 매우 억울한 일일 것이며, 구조주의 관점에서 이해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권의 책이 나를 <예술과 환영>으로 안내했다. 첫째는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인데, 이 책은 우주만큼이나 무한한 신비를 지니고 있는 인간의 두뇌에 대한 무궁무진한 지적 호기심을 유발한다. 뇌, 신경, 인지체계, 그리고 인공지능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탐험하고 싶을 때 출발점으로 삼기에 좋은 책이다. 여기서 갖게 된 뇌와 인지체계에 대한 관심은 에릭 캔델의 <통찰의 시대>로 나를 안내했다. 이 책은 뇌와 인지체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마음의 미래>와 비슷하지만, 무의식의 세계, 그리고 예술을 통한 아름다움의 지각에 대한 감성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 책에서 시지각을 통한 예술작품의 인지 메커니즘을 소개하며 주요 참고문헌으로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통찰의 시대>가 다루고 있는 주요 배경이 ‘빈 1900’, 즉 빈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표현주의적 예술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이며, 저자인 에릭 캔델과 곰브리치 모두 빈 태생이라는 점에서도 절묘한 공통분모가 나타난다.

<예술과 환영>은 인간이 실제를 모사하는 환영을 창조하게 된 시기, 배경, 원인을 미술사적 관점으로 탐구하고, 미술 작품의 인지 및 해설에 관한 시지각의 심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하여 집요하게 탐색한다. 저자의 주된 관심은 ‘학습한대로 그리는가, 지각한대로 그리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습한대로 받아들이는가, 지각한대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즉 미술 수용자의 관점이다. 모든 창조자는 필연적으로 수용자이기도 하기에, 이 두 질문은 결국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두 질문에 대한 정답은 각기 ‘둘 다 맞다’로 너무나 간단하게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정답을 찾기 위한 여정은 집중하지 않으면 금세 나가 떨어져 버릴까 염려될 정도로 방대하며 집요하다. 수많은 도판과 인용, 그리고 실험과 성찰을 통해 정답을 찾으려는 저자의 노력을 477페이지의 빼곡한 활자 속에서 만나다 보면,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의 열정, 그 표상을 보는 것 같다. 특히 곰브리치의 그 특유의 참고문헌 정리는 언제나 자연스러운 경의의 탄식을 내뱉게 하며, 자기 분야에 있어서 지적 즐거움에 심취한 한 고귀한 영혼의 흔적으로서 길이 보존할만하다.

이 책의 서술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한 가지 관념으로 경도되는 것을 끊임없이 경고하는 자세이다. 저자는 일방향의 서술을 전개하면서도 그러한 생각이 유일한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며 끊임없이 상응하는 반례를 제시하고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결국 미술 작품은 물리적 실체이지만 그것을 둘러싼 논의는 관념의 세계이므로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거장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서사의 힘들 지니고 있다. 그 서사는 학습에 대한 열의와 그로 인한 방대한 지식에서 비롯됨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소한 희망이 역시나 불가능 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 희망은 백지 상태의 지각 체계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편견과 선입견, 이른바 사회적으로 부지부식간 학습된 일체의 ‘양식’ 없이 어떤 작품을 바라보고, 나만의 감상을 도출하고 싶은 욕망이다. 저자가 수차례 강조하고 있듯, 인간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양식을 축적하며, 그것을 토대로 세상을 인지한다. 그것은 인류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본능이었을 것이다. “위험은 회피하고, 안락함과 쾌락에는 접근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순식간에 전체적인 맥락을 오감, 특히 시각으로 인식하고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인류의 놀라운 능력이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부족한 신체적 여건을 극복하며 번성해 왔지만 그 능력 탓에 ‘오직 나만의 감상’은 불가능 한 것이 되었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삶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가만 보면 이 책은 컨스터블에 대한 헌정서적이 아닌가 싶다(비록 공식적으로는 엠마누엘 로위, 율리우스 폰 슐로써, 에른스트 크리스에게 헌정되었지만). 컨스터블의 풍경화에서 발견되는 나름대로의 과학적 접근, 즉 실제적 시지각적 발견에 바탕을 두고 자기 확신에 찬 빠른 붓놀림을 보였던 대가의 모습은 곰브리치에게 매우 강렬한 영감을 준 것 같다. 책에 묘사된대로 컨스터블은 19세기 중반에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에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 길은 대중과 아카데미로부터 외면 받을 정도로 황무지는 아니었다. 꽃도 피고, 마차도 다닐 수 있게 어느 정도는 닦아져 있는 그런 길이었다. ‘본 대로 그리는 것’, 그 간단하고도 명료한 진리를 아카데미즘에 살짝 걸쳐 놓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 일이었는지, 단순히 사료만으로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우리는 가늠할 수 없다. 결국 시대의 규범을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아름다움의 지평이 열렸다. 영국에서 컨스터블과 터너가 뿌렸던 작은 씨앗은 엉뚱하게도 바람에 흩날려 프랑스 파리에 인상주의로 뿌리를 내린 것 같다. 오늘날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생각보다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고흐, 모네, 드가를 볼 때, 우리는 그들의 ‘순수한 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덧없이 사라지는 시간에서 잡힌 한 순간에 지속적이고 침착한 존재를 부여해 주는 일”, 이것이 그(컨스터블)의 제작의도이다.

– <예술과 환영>,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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