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리샤르의 「미술비평의 역사(2000)」

2000년에 국내에 출판된 <미술비평의 역사: 미술을 읽는 다섯 가지 방법>은 이미 절판된지 오래된 책이다. 절판된 책을 중고로 샀는데, 그 책의 외관 상태가 의외로 새 것 처럼 매우 좋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이란, 마치 최후의 성배를 발견한 인디아나 존스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만족감을 느꼈다.

미술비평이란 무엇인지, 어떠한 흐름으로 미술 자체의 역사와 연계되면서 발전해 왔는지 매우 궁금했었고, 의외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책들이 시중에 없었기 때문에 책의 구체적인 내용 따위는 미리 파악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장바구니에 넣었었다. 마침내 손안에 들어온 이 책은 그러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매우 역부족이었다.

저자는 이미 서두에서 노골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미술 비평의 역사가 아니라, 그러한 비평의 역사에 대한 서설(序設)”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미술비평’의 역사를 배우고 싶었던 나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87페이지의 얇은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저자를 향해 얼굴을 붉힐 마음은 없다.

궁극적으로 이 책의 최대 미덕은 세부 내용이 아닌 목차에서 발현되고 있다. 이 점에서 “비평의 역사에 대한 서설”이라는 자기고백은 완벽한 진실임이 밝혀졌다. 이렇듯 엄밀한 칸막이로 관념의 세계를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미술의 초행길에서 길을 잃는 구도자들에게 이보다 효과적인 안내자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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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기술적, ⓑ이념적, ⓒ역사적, ⓓ심리학적, ⓔ형식주의적 비평이라는 다섯 가지 대표적인 비평의 기본 틀을 설명하고 각 틀이 고대, 중세, 근대에 어떻게 변화되면서 미술계에서 인식되고 언급되었는지를 개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및 작품들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어떠한 비평이 오갔는지를 예로 들며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역사적 실체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사실 이러한 무난한 개론서 형태의 구성은 미술사 방법론을 다룬 책들과 차별성을 갖는다고 보기 힘들다. 개별 이론들에 있어서 이론가 보다는 평론가들에게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정도…

아마 저자는 1958년에 이 책을 출간할 당시, 42년 후에 ‘South Korea’라는 나라에서 이 책이 ‘Hangul’로 번역되어 출간 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59년 후에 그 나라에서 사는 미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한 남루한 청년이 이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지나치게 모국(프랑스)의 독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모국의 화가 및 비평가들을 많이 언급하는 까닭에, 미술사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주도한 국가가 프랑스인 것으로 오해하게 할 소지가 있다. 적어도 나의 짧은 식견으로 단언하건데, ‘알타미라’ 시대 이래로 미술사를 주도한 국가 같은 것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들라크루와가 단순히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를 넘어, 혁신적인 선대 비평가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 이러한 모국 중심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상일 것이다. 그의 이름은 17개의 소제목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소위 ‘국뽕’을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한 거장의 재기발랄한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알게 해 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특히 그가 사실주의의 대부 쿠르베에게 남긴 평론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짜릿한 장면이었으며, 이 서평을 통해 영원히 내 공간 어딘가에 남겨 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 저주받을 레알리스트야. 너는 혹시 네가 나에게 보여주겠다고 하는 광경이 마치 실제인 것 처럼 내가 착각하기를 바라느냐? 내가 예술 창조의 영역으로 몸을 숨길 때, 나는 사물들의 잔인한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당신의 책을 훑어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당신의 소위 진실한 인물들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내가 길을 가다가 그것들을 발견할 때는 어쨋든 고개를 돌려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모든 더러움과 비참함을 나로 하여금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본문 97p, 외젠 들라크루아(1923), 「문학적 작품(Oeuvres littéraires)」, I.59.

이렇듯 감정의 폭탄과도 같은 솔직한 평론은 오늘날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다. 오늘날의 평론은 마치 전시회의 도록을 장식하기 위한, 카탈로그를 채우기 위한 하나의 소품 내지는 상차림으로 소비된다. 그것은 화가, 화상, 관람객의 니즈(혹은 권력)에 안정적으로 순응하는 미사어구와 현학의 향연으로서 기능한다. 불필요한 도발은 좁디 좁은 미술계에서 ‘문제적 인간’의 낙인을 찍게 하며, 밥그릇을 위협한다. 이러한 ‘미학적 올바름(Aesthetical Correctness)’의 시대에 만난 낭만주의 거장의 생경한 평론은 갓 잡은 고등어처럼 심장에서 파닥거린다. (단, 나는 쿠르베의 안티가 절대 아니고, 오히려 그의 숭배자에 가깝다는 점을 밝힌다.)

비록 이 얇은 책은 미술비평의 역사를 알고 싶은 나의 지적 욕구에 순응하지 못했지만, 저 싱싱한 평론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충분한 소장 가치를 발현하고 있다. 미술의 세계에서 가슴이 답답해 질 때마다 저 문구를 찾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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