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쿨터만의 「미술사의 역사(2002)」

일단 매우 귀한 책이다. 현재 이 책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상태이며, 만약 기필코 손에 넣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정가의 2~5배는 투자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훔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제본 또는 복사를 하는 등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질구질한 수단들을 강구해야 한다. 참고로 절판된 책을 대출하여 개인 참고목적으로 제본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그 사실도 이 책을 얻기 위한 여정에서 알게 되었다.

우도 쿨터만(Udo Kultermann)이 1966년에 저술한 <미술사의 역사(Kleine Geschichte der Kunsttheorie; The History of Art History)>는 1981, 1990, 1996년에 개정 및 증보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김수현 교수가 1996년판을 번역하여 2002년에 출간하였다. 지금 내 손에 들어온 귀한 판본이 공교롭게도 1판 1쇄이기에 최종적으로 몇 판 몇 쇄 까지 인쇄했는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짐작컨대 많은 판수를 찍어내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을 손에 넣기 위해 약 1년 동안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다. 물론 실제로 취한 행동은 고작 인터넷 검색창에 “미술사의 역사, 중고, 팝니다” 따위의 검색어를 다양한 경우의 수로 조합하여 입력하는 수준이었지만, 시시각각으로 올라오는 귀한 매물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 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출판사에 재출간 계획 혹은 본사 보유 재고가 있는지 문의 메일을 보내보기도 했다. 한참 후에야 도착한 답변에는 당연하게도 원하던 답변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현재 이 책의 중고 시세는 정가 25,000원을 크게 상회하는 약 6~15만원에 형성되어 있다. 워낙 귀한 책인만큼 ‘부르는게 값’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한 점에 비춰볼 때, 내가 이 책을 3만 5천원에 획득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보존 상태도 매우 좋은 편이다. 비록 속표지에 책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음을 입증하는 기증 및 소장 정보 스티커가 2겹으로 붙어있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은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제목 없음
중고책 가격비교 노란북(used.noranbook.net) 시세 현황, 캡쳐(2017.9.11.)

미술가들의 역사를 다룬 것이 미술사라면, 이 책은 미술사가들의 역사를 다룬 ‘미술사사’이다. 마치 곰브리치 선생님이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단언했던 것처럼, 미술사의 역사는 어쩌면 개별 미술사가들의 이야기의 총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인문학의 꽃’이라는 다소 감성적인 수식어를 달고 있는 미술사를 이끌어 왔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학문적 업적부터 사소한 언행과 성품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흥망성쇠를 모두 아우르고자 했던 저자의 야심이 느껴진다.

687페이지에 달하는 둔기 수준의 두툼한 물리적 존재감은 이 책이 아마추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벼운 입문서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이 절판되기 전에는 미술사 관련 서고에 꽂혀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 미술 관련 책에서 주인공을 자처하는 아름다운 도판은 거의 찾기가 힘들고, 있더라고 흑백이다. 도판보다는 오히려 미술사가들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더 많다는 점은 이 책이 미술사가 아닌 미술사사에 관한 책임을 보다 분명히 해준다. 휘황찬란한 미술사 교과서에만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낱 고문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미술사 방법론과 제 분석 이론, 그리고 미학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만한 선물이자 길라잡이는 없을 것이다.

역자에 따르면 책에서 언급되는 미술가, 미술사가만 1,500명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인명색인만 37페이지를 차지한다. 이 인명색인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상 가장 가까운 곳에 이 책을 놓아두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저자는 시대, 주제, 학파별로 핵심적인 미술사가들을 언급하고 그 외에 주변적인 인물들, 영향을 받은 인물들을 언급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주제로 작품을 분석하고 싶거나, 특정 학파의 견해에 첨언 및 논박을 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목차와 인명색인을 보고 핵심 저자 및 저술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종은 울렸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를 이끌어 왔던 국가를 하나만 꼽으라면 독일을 꼽는 연구자들이 많을 것이다. 위대한 미술의 이정표는 그리스, 로마, 피렌체를 가르키고 있지만, 적어도 미술을 둘러싼 사상적 성취의 중심에는 빙켈만, 괴테, 부르크하르트, 헤겔, 칸트가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독일 태생이라는 점은 이 책의 학문적 중립성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독일 연구자들의 위대한 성취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서방 국가들의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의 연구자들이 이 책에서 할당된 분량 만큼의 성취만 거두었는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독일 연구자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별도 챕터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개별 미술사가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저술, 인품, 학맥, 소소한 삶의 에피소드와 취향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반면, 그 외 국가들의 연구자들에 대해서는 학문적 성과 위주로만 간략하게 언급되며, ‘기타 등등’ 취급을 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저자의 태생적 배경과 문헌 접근성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지만, 미술사의 발전 과정에 대한 균형 잡힌 안목을 갖기 원하는 독자라면 마땅히 비판적 견지에서 이를 감안하여 읽을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술사의 역사>가 달성하고 있는 학문적 성취를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토록 미술사가들의 위대한 성취를 일목요연하게 대하소설식으로 정리한 야심찬 저술은 없다. 주요한 미술사가들의 핵심 저술과 학문적 성과, 미술사의 계보 속에서 그들의 위치, 거기에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신랄한 평가까지 더해져 이 책은 미술사라는 학문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일종의 지적 관음증을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해결해 주는 성취에 도달하였다. 이토록 전문적이면서도 미시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방대한 책이 한국의 척박한 학문적 토양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따지고 보면 기적적인 일이다. 아마 아직은 출판시장이 건재했던 당시라서 가능한 출간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시종 학문 전체를 아우르려는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하지만 에필로그에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내놓으며 미술사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심장을 울린다. 저자는 동시대 미술과 교양 있는 독자들, 그리고 미술애호가들에게 숱한 영향을 미치며 시대의 미적 준거를 창출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드높여왔던 위대한 미술사가들을 언급하며, 그러한 시대가 종영되었음을 아쉬움 속에 성토하고 있다. 지적 엘리트가 미적 준거를 제시하는 시대는 진정 끝났을 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 미술은 시대를 앞서가다 못해 아예 다른 차원의 시대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과 평행선을 달리기는커녕 그들의 꽁무니에서 보기 좋은 주석을 달고 있다. 평론은 전시를 위한 소품이 되었고, 미술계를 움직이는 상업적 매카니즘의 선순환 고리 중 하나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오늘날의 미술사가들에게 통합적·통섭적·다학제적 지식, 그리고 시대적 변화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비판적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지배적) 지식이 완전한 진리는 아닐 수 있으며,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일 것이다. 국가, 시대, 소재, 주제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 목록만 보더라도 그가 진정 스스로 주장한대로 통섭적 지식을 주구한 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치가 현재를 뛰어넘어 정가의 10배, 50배에 도달하는 시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책을 소장 도서 리스트에서 배제할 마음이 전혀 없다. 이 책은 늘 나의 손닿는 곳에 존재하며 미술사로 들어가는 여정을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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