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 「추의 역사」

읽고 싶은 책이라기 보다는 갖고 싶은 책이다.  어마어마한 무게감과 두께, 그리고 그것을 압도하는 저자명의 가치가 최상의 지적 사치를 보장할 것만 같다. 이것을 서고에 장식해 두면 서재에 방문하는 누구에게라도 미와 추에 관한 인류 지성사의 위대한 발견들에 오롯이 동참했음을 당당하게 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미학자, 기호학자, 사상가, 수집가(?)이며, 취미 겸 알바로 소설을 쓰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미와 추에 관하여 인류가 발견하고, 논쟁했던 모든 화두들을 야심차게 끄집어내어 정리한 책이다. 1권인 <미의 역사(Storia Della Bellezza)>는 2004년에, 2권인 <추의 역사(Storia Della Bruttezza)>는 2007년에 출간되어 각각 이듬해에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독특한 점은 <미의 역사>가 지롤라모 데 미켈레와의 공동저술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표지에서 전혀 언급이 되고 있지 않으며, 목차 앞 서지 정보에만 간략히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켈레의 분량이 에코에 비하여 절대 적지 않던데…. 이 정도면 에코의 명성에 지나치게 편승하는 사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추의 역사>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에코의 단독 저술이다.

이 책에서 미켈레의 분량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차치하고, 지독할 정도의 정리벽/수집벽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저자가 에코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연대순을 따르지만 그 안에서도 공시성을 놓지 않으며 주제별로 미와 추의 관념들을 정리 해 놓았다. 대체적인 주제의 핵심 개념과 시대적 분위기는 에코가 설명해 주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서 주인공이 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책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가 인용한 수 많은 고전과 문헌들이다. 인용 텍스트들은 에코의 설명을 뒷받침해주거나 주요 사례가 될 수 있는 것들로서, 저자의 수정을 거치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실었다. 분량 면에서는 에코의 저술 부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추의 역사>에서는 확실히 더 많다). 책을 미리 열어보지 않으면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고, 에코가 오롯이 이 막대한 분량의 책을 자신의 문장으로 서술해 나갔을 것이라고 기대한 팬이 있다면 큰 실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인용으로 전체적인 서술을 이끌어나간다는 사실은 이 책을 쉽게 읽지 못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기도 하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고전들은 19세기 이전 문헌들도 상당한 지라 문장 자체가 고어체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것을 번역했다. 심지어 그 번역이 전체적인 문장의 맥락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애초에 발췌된 토막글인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더군다나 다수의 인용문은 애초에 전문이 우리나라에서 단 한 차례도 번역된 적이 없는 희귀한 문헌들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이 책의 번역 작업은 그야말로 번역가로서의 최상의 난이도, 즉 ‘극한직업 번역가편’에 해당하는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두 명의 번역가는 작업 후기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토로한 바 있다.

사실 나도 몰랐다. 저자의 서술이 이렇게 적을 줄은… 그리고 이렇게 인용과 도판을 통해 하나의 미학 서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미학 아카이브’로서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데는 4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토막토막 잘라진 인용문의 앞뒤 맥락을 추론하면서 “에코가 이 주제에서 왜 이 문헌을 인용하였을까”를 유추해야 하며, 관련된 도판을 보면서 또 다시 저자의 의도를 분석해야 하기 때문에 술술 읽어 넘길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심지어 각각 437, 453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들고 다니면서 읽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정된 장소에서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게 한 요인이었다.

분절된 네러티브와 인용문의 홍수 속에서 힘든 독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에코의 집념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식세계에 동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한 경험이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솔직히 <장미의 이름>을 완독하지 못했다. 언제 이 모든 실마리가 풀릴지 끈기있게 기다리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완독이 더욱 의미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에코가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용문들의 전체적인 내용과 관련 지식들을 미리 두뇌에 탑재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이런 방대한 프로젝트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에코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샘솟는 시간이었다.

비록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으나, 인류가 발견했고 언급한 모든 미와 추의 관념을 응축해 놓은 이 아카이브를 언젠가 반드시 요긴하게 다시 훑어볼 날이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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