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런스 블록의 「빛 혹은 그림자: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2017)」

S유통사의 CF와 <빈방의 빛>으로 촉발된 에드워드 호퍼 열풍이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소설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이 마치 연극처럼 어떤 이야기들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은 전에도 언급한 바 있고,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닌 것 같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영상으로 풀어낸 것이라면,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는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로런스 블록(Lawrence Block)의 요청에 따라 위대한 소설가들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고 떠올린 이야기들을 단편 소설로 풀어냈고, 그 야심찬 결과물이 이 책에 모였다. 18점의 호퍼 그림이 17개의 이야기를 모았고, 1개의 이야기는 공란으로 남았다. 본 소설집의 마지막 수록작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의 저자이자, 이 책의 총괄 책임저자인 로런스 블록은 공모에 실패한 1개의 이야기를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실패 마저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며 독자들과 유쾌한 게임을 시도하는 그의 재치에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이 책이 출간된 시점에 ‘내 마음 속 월간 구매 가능 도서 한도’는 이미 초과한 시점이었지만, 구매 버튼을 향한 나의 클릭은 멈출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직접 글로 적어 놓고, 출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이 기획은 미술사와 문학사의 접점에서 공통적으로 주요한 이정표로서 영원히 기억될 자격이 있다.

각 작품은 검증된 대가 혹은 신예들의 것으로서 평균적으로는 기본 이상이다. 물론 게중에는 실망스러운 것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대와 취향의 문제일 뿐, 전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의 수준은 뛰어나다. 번역도 나무랄데 없다.

내 가슴에 와닿은 이야기들은,

1. 질 D. 블록 – 캐럴라인 이야기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가 교차된 시점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한 지점에서 통합된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해야만 했던 모녀는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피’는 그들을 한 자리로 이끈다. 얼핏 막장드라마로 귀결되기 쉬운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 이야기를 시점의 교차를 통해 신선하게 풀어냈고, 담담한 서술이 여운을 더했다.

2. 니컬러스 크리스토퍼 – 바닷가 방

베일에 둘러싸인 한 남자를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가문의 신비스러운 전설을 다루고 있다.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그저 바닷가의 방만 드러나는 호퍼의 그림에서 이토록 환상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는 것이 놀랍다. 어쩌면 그림과 이야기의 간격이 가장 큰 작품일 수도 있으나, 공간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그 공간에서 숨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작가의 천재성을 칭찬해야겠다.

3. 존 R. 랜스데일 – 영사기사

대체로 ‘초단편’을 지향하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작품인 것 같다. 전형적인 헐리우드 누와르 복수극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고통스러운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의 성장에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참여시키고 있다. 남들에게는 그렇게 쉬워보이는 행복을 향한 여정이 왜 이리도 고되고 힘든 것인지. 이 작품은 어쩌면 우리가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일상을 목숨걸고 지켜내고 있는 소리 없는 영웅들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4. 조이스 캐럴 오츠 – 창가의 여자

창가에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이야기를 교차된 시점으로 표현했다. 애증으로 들끓는 두 사람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피, 폭력, 섹스가 난무하는 풍경은 언제나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며, 눈을 땔 수 없게 만든다. 이 작품은 그 세 가지가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등장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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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수록 작품들은 하나 같이 훌륭하게 쓰여졌거나, 문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시 대가들은 이름값을 한다.

단, 가장 권위 있는 에드워드 호퍼 연구자인 게일 레빈의 첫 소설 작품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은 것 같다. 너무 많은 지식이 오히려 이야기를 방해한 것일까. 서술이 산만하며 끌어당기는 맛이 없었다.

끝으로, 이 책을 제주도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한 나의 결정에 칭찬해 주고 싶다. 이 책은 여행자의 책이 갖추어야 할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 즉, 어떠한 환경에서도 쉽게 몰입되며, 호흡이 짧고, 가볍고, 심지어 어디에 올려 놓아도 예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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