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서편제(광림 BBCH홀)

공공연한 문화사대주의자에 가까운 내가 제 값을 지불하고 창작뮤지컬을 보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이 작품은 꼭 봐야 했다. 주요 넘버인 <살다보면>을 처연하게 부르던 한 여인과의 추억 때문이다. 그녀가 부르던 그 노래는 그야말로 한을 담뿍 담고 있어서 마냥 해맑게만 보였던 그녀의 이면을 보여주었다. 작품을 보기 전에 이미 이 노래는 내게 매우 의미있는 사운드트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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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은 얼핏 치킨 프렌차이즈를 연상케하는 광림 BBCH홀이다. 작품에서 벗어난 사족이지만, 이 공연장이 입주한 건물에 들어서면 대한민국 개신교의 탐욕이 느껴진다. 막대한 건축 헌금을 모아 압구정 금싸라기 땅에 들어선 이 문화센터는 교회의 문화사역 및 사회공헌이라는 뽀송뽀송한 탈을 쓰고 있을테지만, 내게는 그저 씩씩거리는 한 마리 티라노사우르스처럼 보인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중산층들을 등에 엎고 종교, 문화, 나아가 삶까지 집어 삼키고 싶은 욕망의 피조물. 그 욕망은 13세기 고딕성당이 추구하는 이상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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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와서, 본 공연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살다보면>은 실망스러웠다. 송화 역의 이자람은 ‘소리’와 눈웃음에 있어서는 탁월했지만 흔히 귀에 익어 있는 뮤지컬 창법에는 익숙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 <살다보면>을 포함해 힘을 빼고 부르는 넘버가 많았던 1막에서 시원함 보다는 답답함과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차지연의 시원스러움에 익숙했던 내 고막에 먼지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2막에서는 ‘소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고, 소리가 아닌 노래에서도 폭발적인 한의 정서로 인해 소리처럼 처리 되었다. 특히 <원망>에서 소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전문가인 그녀의 장점이 폭발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렇게 음을 찍는 것과 소리를 지르는 것 사이의 균형잡힌 처리가 작품의 주제의식과 결부되어 올바른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아버지 역의 서범석은 인터미션 시간에 복도에서 들은 관객들의 잡담을 인용해, ‘제 옷을 입은 듯’ 했고, ‘이젠 정말 한이 쌓일대로 쌓인 것’ 같았다. 동호 역의 박영수는 비록 섬세하지는 않았지만 폐부를 파고드는 성량에 힘입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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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혁신, 억압과 혈기, 노래와 소리가 대립하는 원작의 주제의식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프로젝터로 표현한 무대는 비록 가장 손쉬운 접근일지는 몰라도 감정선을 거스르지는 않기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선택이다. 가장 칭찬할만한 점은 ‘뮤지컬화’ 하기 위해 종종 선택하곤 하는 낭만적 포장을 굳건히 참아내고 걸쭉하게 뜸을 들이면서 여운을 남기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이기 위한 한이 쌓일 시간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더 깊어질 시간은 필요할지 몰라도.

뮤지컬 서편제(광림 BBCH홀)”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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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연 카테고리 글은 하나도 안읽다가 슬슬 읽기 시작했는데 국문학 작품인 서편제가 있네요. 개인적으로 소설은 지루하고 별로에요 ㅎㅎ 송화 아버지의 행동은 오늘날로 치면 아동폭력이고요 ㅎㅎ

    서편제 영화는 재밌게 봤는데 창극은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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