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긴 책은 처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위트 넘치는 진솔한 조언들로 가득찬 이 글쓰기 안내서는 미술에 대하여 말하거나 글로 남기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만한 미덕으로 가득하다.
예술적 경험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나로 하여금 이 보잘 것 없는 공간을 개설하게 하였고, 없는 살림에 매년 4만원 이상을 결제하게 하였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숱한 고민과 탈고의 시간을 보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나의 감상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 한 자 두 자 적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감상해서 쓰는 것’인지, ‘쓰기 위해 감상하는 것’인지 헛갈리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한 달에 네다섯명 남짓 읽을 글을 탈고하다보면, ‘이건 글을 쓰는게 아니라 자위행위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글로 남기고 싶고, 이왕이면 누가 봐도 멋드러지게 남기고 싶다는 내 안의 욕망이다. 그러한 욕망이 또 다시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집어들게 하였다.
처음에는 영어권 저자의 글쓰기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구심이 앞섰다. 그도 그럴것이, 글쓰기란 사유를 기반으로 하며, 사유란 모국어와 소속 문화권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자명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은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핵심적인 요령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거기에 유려한 번역이 더해져 나의 우려가 기우였음이 증명되었다. 이 책에서는 완벽한 전시에도 비판할 점이 있고, 최악의 전시에도 호평할 것이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이 책을 완벽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내용과 서술은 물론이거니와 글쓰는 사람의 노트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편집과 버건디의 포인트 컬러까지 모두 마음에 쏙 든다.
「현대미술 글쓰기(How to Write About Contemporary Art)」는 제목 그대로 동시대 미술에 관한 정보와 감상을 어떻게 기술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책은 크게 ‘훈련’과 ‘요령’의 두 가지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요령’은 다양한 유형(학문적 글쓰기, 설명하는 글쓰기, 평가하는 글쓰기 등)의 글쓰기에 대한 실무적인 상세요령을 다루고 있으므로, 해당 부문의 글을 써야 하는, 혹은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다소 전문적인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정말 중요한 단락은 그 앞에 등장하는 ‘훈련’이다. 이 단락에서는 예술을 설명하거나 평가하는 글을 쓰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제반 원칙들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 원칙들이 구구절절 너무나도 옳은 말들이므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강렬한 공감이 우러나는 동시에, 그러한 원칙들을 철저히 거부했던 나의 과거 글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엄청난 회한을 야기하기도 한다. 미술 글쓰기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나에게는 요즘 말로 ‘팩트폭격기’,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발견한, 뒤통수가 얼얼해 질 정도로 공감한 진리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첫째, 추상적인 개념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지 말라. 구체성이 없는 글을 쓰지 말라(와플_waffle). 유식해 보이기 위해 어려운 용어를 동원하지 말라. 모호한 수식어로 회피하지 말라.
둘째, 풍부한 동사와 형용사를 발굴해서 사용하되, 두 개 이상의 동사 및 형용사를 중첩해서 사용하지는 말 것. 작품을 묘사 할 때는 생동감 있고 독창적인 동사와 형용사로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도록 서술한다. 구체적인 명사를 써야 한다. 반면, 불필요한 부사는 과감하게 배제하라.
셋째, 의견을 내 놓는 것, 평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대신 주장할 때에는 명확한 근거와 사례를 대야 한다. 근거와 사례는 조사에서 비롯된다.
넷째, 감정에 휩싸여서 호들갑 떨지 말자. 완벽한 작품, 전시, 경험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반대로 장점이 전혀 없을리도 없다.
다섯째, 충돌하는 두 개념을 한 문장에 써서 ‘뭔가 있어 보이게’ 하지 말라(예티_yeti).
여섯째, 미술에 대하여 글을 쓰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 ⓐ 그림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 그림의 의미를 풀어본다, ⓒ 왜 지금 우리가 이 그림에 주목해야 하는지 논한다.
위 진리들이 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은 것은 그만큼 내가 하지 말라는 저 ‘짓거리’들을 늘상 무비판적으로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내가 쓴 글들의 모호함, 어려운 단어에 대한 사랑, 거의 베르테르 수준의 맹목적인 호들갑 등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 실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모순되는 두 개념을 한 문장으로 묶어서 표현하는 이른바 ‘예티(yeti)’는 내가 정말 즐겨하던 서술방식이었으므로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내가 무언가에 대하여 글로 남기고 싶을 때 꼭 상기해야 할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얻었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별개이지만 말이다. 저자의 오랜 실무에서 비롯된 귀한 노하우를 정말 손쉽게 획득한 것 같은 느낌이다. 편집과 디자인도 깔끔하고, 중간중간 은밀하게 숨어있다 훅 튀어나오는 저자의 유머와 재치도 정말 발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호들갑 떨지 말고 비판할 구석을 찾아보라고 했으니 그 조언을 따르고자 한다. 모든 아트라이터들이 저자가 원하는 경지에 도달해서, 이 책의 가이드라인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글들을 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어딘가 이상한 글, 모호한 글, 얼빠진 글들도 한데 어우러져 미술 주변부의 아름답고 균형잡힌 생태계에 일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좋은 글’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되새겨보면, 이 책의 가이드라인을 모두 충족하는 글들만 ‘좋은 글’의 낙원에서 먹고 마시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도 결국 내가 되고 싶은 것은 그 낙원의 왕위계승자 내지는 적자가 아니라 매력적인 이단아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