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국의 「제국과 낭만: 19세기 화가는 무엇을 그렸을까?(2017)」

제국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착취를 통한 조국 근대화. 이 개념들은 어쩌면 우리 민족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상체계이다. 오히려 우리의 역사책은 이 개념들을 무기로 들고 다니던 자들에 의하여 짓밟혔던 기록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DNA들을 단 한 번도 혈관 속에 품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종의 문헌들을 읽어봤자 머리로는 알 수 있지만 마음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알고 싶은지도 모른다.

정진국의 「제국과 낭만」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19세기 열강들의 근대사를 되돌아보며 가학적 성장과 부의 축적,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낭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고찰한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가장 명백한 시각적 흔적인 미술 작품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낸다.

아마 저자는 제국주의 수탈사의 다양한 단면들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는 동시에 당대의 미술 작품을 토대로 시대의 정서와 감성까지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그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싶다.

일단은 사족이 많다. 감정적인 의문사와 감탄사가 많다. 이 책을 정통 역사서로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감정적 서술들은 독자의 지적 몰입을 방해한다. 심지어 해당 사태를 바라보는 저자의 감정을 노출하는데서 더 나아가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최근(저자가 한창 열심히 저술했을 2016년 말)의 국내 정치 상황에 빗대어 꼬집는다. 이런 문장이 최소 10여개는 등장하는 것 같다.

저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 책이 독자의 서고에서 장기적으로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는 문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처럼 동시대적 감각에 집중적으로 소구하는 서술을 자제해야 했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최근 우리 국민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사건은 맞지만, 그 사태에 관한 역사적 무게감은 현재의 우리가 차마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재의 국내 정치상황을 빗대어 과거를 되돌아보는 기술은 시사주간지 특집기사나 정치평론가의 논평 정도면 족하다. 최소한 내 서고에 두고두고 꽂혀 있을 역사책이라면, 이렇게 단기적인 시각으로 비교분석하는 문장은 없었으면 한다.

19세기 제국주의와 관련하여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을 스치듯이 지나쳐 버리는 것도 문제다. 요컨데 산만하다. A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해서, ‘아, 이 챕터는 이 사람에 관한 에피소드구나’ 싶으면 돌연 B를 이야기하고, 순식간에 B의 사촌이라며 C를 논하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해당 장의 핵심 인물은 C였던 것이다. 이쯤되면 A는 논의의 서막을 이끌어내는 존재로 인정해 줄만 하지만, B는 왜 등장한 것인지 모르게 된다. B가 불필요하게 궁금해진다. 이런 식으로 주제에 크게 연관되지 않은 인물들이 스쳐지나가 듯 언급되는데, 저자가 그저 자신의 역사 상식을 드러내고 싶어서 언급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장별로 에피소드를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아무런 결론도 도출하지 않고 끝내버리는 것도 산만함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다. 역사서가 아니라서 그냥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나열한 것이 애초에 의도한 바라고 하더라도 굳이 장을 구분해 놓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과 비판을 전개했다면 장별로 하나라도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글을 마쳤어야 한다.

그림의 역할은 애매하다. 그림에서 우리가 읽지 못하는 메시지나 새롭게 일깨워주는 사실들이 거의 없다. 저자는 역사와 그림을 함께 다루는 책을 기획했는데, 무게 중심 자체는 역사에 좀 더 치우쳐있다(마케팅은 그림 쪽으로 치우친 것 같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 명화들은 그저 역사책 속의 삽화역할을 맡는 것 같다.

끝으로, 인용문이 과도하게 길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다양한 역사가 및 철학자의 관점이 궁금할 수 있고, 때론 유용하기도 하겠지만, 너무 길어지면 관점이 산만해진다. 인용문이 어떤 의도로 삽입된 것인지 의구심만 자아낸다. 3페이지 정도를 차지하는 인용문도 있는데, 귀한 문헌인 것은 알겠으나 그 문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곱씹어 봐야 하는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사상을 배우라는 것인지, 실제적 사실을 익히라는 것인지 헛갈린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귀한 원문을 찾아 직접 번역해 실었다며 독자의 칭찬을 요청하고 있는데,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격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국과 낭만」은 그림 속 숨은 비밀을 파해쳐서 지적 만족감을 주는 책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통시적/공시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그림의 감성으로 보충해주는 책도 아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지점 어딘가에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귀한 소재가 참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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