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새로운 시선(Vincent Van Gogh: A New Way of Seeing, 2015)

최근 작성 한 글에서 메가박스의 ‘스크린 뮤지엄 시리즈’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고, 총 다섯 편 중 첫 번째 편을 놓쳤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통신사 상담원의 반 협박에 못이겨, 생애 최초로 IPTV를 설치하였는데, 거기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다큐멘터리 중에 바로 그 첫 번째 편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다.

광기어린 천재 예술가에 대한 매우 풍부한 정보들을 담고 있는 「반 고흐의 귀」를 읽은지 사나흘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인지라, 고흐에 대한 나의 지식 수준은 어느 때보다 고양된 상태였다(물론 타인이 아닌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나의 마음가짐은 ‘그래, 어디 한 번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려줘봐’라는 불손한 것이었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을 연상케하는 제목과 달리, 이 다큐멘터리가 나에게 주는 새로운 관점이나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한 예술가의 생애를 묵묵히 조망하는 이 다큐멘터리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내가 직전에 읽은 버나뎃 머피의 책이 담고 있는 정보가 워낙 세세하고 방대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고흐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 큐레이터 및 미술사학자가 설명하고, 재연 배우가 고흐의 생애를 묘사하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재연 장면에서 나레이션으로 등장하는 고흐의 편지 중 머피의 책이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언급하자면, 우리가 흔히 고흐의 유작으로 알고 있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_Wheat Field with Crows>은 사실 진짜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흐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가장 공신력 있는 기관은 아무래도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 일텐데, 거기서 인정하는 바로는, 테오의 친구이자 처남(형님)인 Andries Bonger의 증언에 따라 <나무 뿌리_Tree Roots>가 고흐의 진짜 유작이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생애 마지막 주에 그려진 그림은 맞지만, 그후로도 일곱 작품이 더 그려졌으며, <나무 뿌리>는 자살 시도 당일 아침, 그러니까 1890년 7월 27일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유작으로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지금도 구글에서 ‘last painting of van gogh’를 검색하면, <나무 뿌리>도 등장하기는 하나 그 비중이 매우 적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한다. 어쩌다가 이 작품이 고흐의 유작으로 여겨지게 된 것일까. 나의 경우는 한 아나운서 출신 미술전시 기획자가 사내 교양세미나에서 고흐의 삶과 예술에 대하여 감동에 벅차 강의하는 것을 듣고 그렇게 알게 되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을 것이다. 감동 위주의 강의, 도판 위주의 미술책, 원본 없는 전시는 늘 오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미술사에 있어서 자료가 부족하거나 번역 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특정한 사실관계에 대하여 호도된 지식이 널리 전파되는 일은 늘상 있어왔다. 그렇기에 잘못된 사실을 전파하는 사람을 탓하기도 애매하다. 미술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작가와 작품에 관한 ‘진짜 1차 자료’에 접근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어차피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복제의 복제’, 그리고 데리다가 해체한 복제물들의 반복적 재생산이라는 물컹한 지반 위에 위태롭게 서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점유한 회화적 가치일지도 모른다.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저녁 어스름의 하늘을 날아가는 까마귀때는 불길함을 고조하며, 그와 대비되는 밀밭의 선명한 황금빛 물결은 스산한 바람소리마저 귓가에 어른거리게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죽고 싶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그릴 법한 이 작품은 고흐의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순간에 관한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그 어떤 작품 보다 더 최적의 심상을 부여하는 듯하다. 그에 반해 진짜 유작인 <나무 뿌리>는 어떤가. 제 아무리 언어의 연금술사라 할지라도 광기어린 천재 예술가의 비극적 자살과 연관지어 스토리텔링 하기에는 다소 무리일 것이다. 나라면 기껏 해봤자, “뉘넨, 파리, 아를, 오베르 쉬르 우아즈… 그 어디에서도 이루지 못한 그의 공존, 그리고 정주 욕망이 견고하게 서로를 움켜쥔 나무 뿌리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이 정도 수준이겠지만…. 이 역시 억지로 보인다.


생애 최초로 설치한 IPTV의 기본 콘텐츠들을 대강 살펴보니, ‘스크린 뮤지엄 시리즈’를 비롯하여 미술을 다룬 양질의 다큐멘터리가 상당 수 포진하고 있다. 당분간은 미술 콘텐츠를 찾아 떠나는 모험에 시간과 열정을 허비할 필요 없이, 이 녀석들만 차례로 훑어봐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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