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대해서 잘 쓰고 싶은 마음에 길다 윌리엄스의 「현대미술 글쓰기」를 읽었는데, 그 책의 후미에 있는 ‘감수의 글’에서 이번 책,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를 알게 되었다. 「현대미술 글쓰기」의 감수자는 그 동안 실반 바넷의 책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길다 윌리엄스가 적절하게 보완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길다 윌리엄스는 실반 바넷의 책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미술 전공 학생들에 국한되지 않고 더 다양한 계층에 소구하는 실용적인 지식과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반 바넷의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는 두 가지 측면에서 「A SHORT GUIDE TO WRITING ABOUT ART」 라는 원제를 배신하는데, 첫째, 절대 짧지 않다. 아마 저자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싶었을 것이고, 동시에 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학생들의 헛된 기대를 미연에 차단하고 싶었을 것이다. 둘째, 미술 외 주제의 전반적인 인문사회학 논문 및 에세이를 쓰는데 필요한 일반론들을 많이 담고 있다. 저자가 스스로 이미 인정하고 있듯, 이 책은 이제 막 학문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한 대학생 및 대학원생들의 교재가 될 것을 염두하고 쓰여졌고, 예비 독자들이 요구하는 덕목들에 철저히 응수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역력하다. 그 결과, 아직 논문을 비롯한 학술적 글쓰기의 기초가 미진한 영미권 저술가들에게 이 책은 보편적인 가이드로서 손색이 없다. 반면, 학문적 글쓰기에 이미 익숙한 독자가 단순히 ‘나는 미술품 분석과 그에 관한 서술에만 관심 있을 뿐이야’ 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든다면, 매일 등교길에 들었을법한 어머니의 잔소리를 오랜만에 다시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예상과 달리 이 책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으로라도 미술사 방법론(도상학 및 도상해석학, 사회사적 분석 방법론 등)을 다루고 있고, 틀리기 쉬운 철자(물론 알파벳)와 논문 작성의 재료가 되는 메모 작성 노하우까지 전수하려 하기 때문에 매우 친절하고 광범위한 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글쓰기 책이 친절하려 하면 할수록 기초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독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선물처럼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야 할 것이다. 좀 지루해지는 면이 있다.
번역자 이름이 주는 권위에 비하여 번역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김재원 박사에 이어서 사상 최초의 부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김영나 박사에 비하면, 언니인 김리나 박사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하지만 김리나 박사는 인생에서도 학문에서도 김영나 박사의 선배이며, 불교미술사학계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다. 그러한 전문성을 지닌 역자가 단순 번역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전공과 지식을 살려 한국의 연구자라면 어떻게 지식을 얻고 글을 써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알려 준다. 마치 ‘이런 책이 한국에 없기 때문에 내가 이거라도 번역해서 소개하지만, 너희 후배들은 영어권 학생들과 다르므로 이런 걸 특별히 유념해야 한다’는 대선배의 애정어린 조언 같다. 심지어 역자가 찾아서 추가한 예문도 있다. 그런 개입은 한국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으나, 번역 자체의 질은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아쉽다. 군데군데 어색한 부분을 두 번, 세 번 다시 읽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이 책의 최대 장점은 글쓰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것 보다는 계속 질문을 던져준다는데 있다. 질문은 얼어 붙은 호수를 깨뜨리고 사유를 이끈다. 해체의 출발점은 의심과 질문이다. 원제에 없는 ‘미술품 분석’이 얄팍한 상술과 손을 맞잡고 한국어 제목으로 채택된 까닭은, 그것을 하고 싶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품 분석에 대한 단일한 시선, 방법론, 기준, 원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17세기 아카데미는 그것 들을 가지고 있었을지 몰라도,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을 낙선전에 제출한 순간, 피카소가 인물을 입방체로 쪼갠 순간, 뒤샹이 변기에 서명한 순간, 멜 보크너가 바인더를 미술이라고 우긴 그 순간, 모든 분석의 논리는 사라졌다. 수 많은 이론, 역사적 진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공시적 감각과 담론들이 관람객과 작품, 그리고 작가 사이를 둘러싼 대기에 켜켜이 내려 앉아 교묘한 상호작용을 이룰 때, 작품을 둘러 싼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며 분석은 이미 시작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우리가 잊고 있었을 다양한 질문들을 상기시키며, 하나의 작품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질문들은 이 책을 읽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 하나 답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아마도 활자 수에 비하여 곱절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