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출1985, 역2002)」

대학교때 까지는 소설을 많이 읽었다. 주로 집어 들던 소설들은 전쟁, 민주화 운동 등 급박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인물들의 고뇌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식으로 성찰을 하다가 이내 ‘그래도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여서 참 다행이야’라는 막연하고 비겁한 결론으로 귀착하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적인 읽기에 비하여 감성적 읽기를 경시하는 경향이 심해지면서 점점 소설과 멀어졌고, 올해는 단 두 권의 소설만 읽었다. 그래도 여행을 떠날 땐 부담스러운 교양서보다는 소설을 들고 싶다. 여행지에서만큼은 앎의 강박을 훌훌 버리고 싶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캐묵은 인종주의, 국가주의가 대두되고, 덩달아 젠더 이슈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ntness)은 위선이라는 주장을 꾹꾹 눌러담고 있던 이들이 용기를 내어 전면에 나타났다. 존경할 수 없는 자를 수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런 수장을 선택한 동시대인들과의 불가피한 공존 자체가 더 큰 고통일지 모른다(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이미 그 감정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불편한 공존은 집단 간의 반목과 분열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때마침「시녀 이야기」가 드라마화되면서 이 시대의 이슈와 절묘하게 궤를 함께하는 그 독특한 주제의식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베스트셀러’, ‘화제의 신간’, ‘MD’s 초이스’ 따위를 강박적으로 피해다니는 편이기는 하지만, 성과 권력의 이중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소설가들에게는 진정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탄탄하게 구상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절제된 시각으로 보여준다. 거대한 대성당을 원경에서 짠 하고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돌, 주두, 박공, 부조 하나하나를 비서사적으로 공들여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머리 속에서 전체 덩어리가 완성될 수 있도록 돕는 식이다. 이토록 질박한 방식으로 찬찬히 구축된 세계는 날림공사로 올라간 조립식 건축물과는 달리 독자의 머리 속에서 더 강한 현실감으로 우직하게 뿌리를 내린다.

완벽하게 통제된 세상에서 모든 생득적 욕망을 거세 당한채 도구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는 분명 조지 오웰의 「1984」를 상기시킨다. 「1984」가 ‘권력 대 개인’의 이야기라면, 「시녀 이야기」는 ‘남성권력 대 여성’의 이야기로 범위를 좁혀 놓고 피지배자의 보다 내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작품을 재평가하기 위해 굳이 ‘패미니즘 소설’로 범주화하는 것은 불필요하지만, 작가가 여성이기에 ‘시녀’의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기독교-가부장제’의 권력에 철저히 이용당하면서도 (이성애적) 여성으로서의 성적 욕망을 부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 실존을 자각하려고 애쓰며, 함께 압제 받는 여성들에 대한 경멸과 동지애 같은 이중적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느낀다. 스스로도 정리하지 못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주인공은 매 순간 생존(실존)에 대한 처절한 희망을 견지한다. 어떠한 비극 속에서도 결국 인간이 인간 다울 수 있는 조건은 삶의 의지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이 소설에서 권력의 리얼리티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보이는 대목은 권력이 피지배자를 손쉽게 다루기 위하여 취하는 접근 방법이다. 여러 가지 전략이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은 비지배자가 자기들끼리 죽이고, 강간하고, 신고하고, 압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권력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방식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피지배자가 스스로의 발목을 옥죄는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비지배자에게 계급을 부여하고(‘아주머니’와 ‘시녀’),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눈’), 살아 남기 위해서 결국 서로를 강간하거나 죽이도록 유도한다(루크와 고양이). 우리 민족이 일제강점기에 고통 받았던 방식이 바로 이러한 것이고,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재 우리와 마주한 가장 호전적인 집단이 매일 같이 하고 있는 방식, 그리고 그 곳의 정치범수용소에서 가장 극명하게 저지르고 있는 만행들이 이런 방식들이다.

권력이 차츰 유형적 제도의 형태를 벗고 문화와 가치관이라는 부드럽고 은밀한 옷으로 갈아 입는 현 시점에도 이와 같은 지배 메커니즘 자체는 「시녀 이야기」 속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가져야 한다. 만연한 폭력 속에서 권력의 의지를 식별하는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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