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살과 피의 환상(Goya: Visions of Flesh and Blood, 2015)

‘Exhibition on Screen(국내명: 스크린 뮤지엄)’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 메가박스에서 정식 수입/상영하는 것으로는 세 번째 작품이다. 이제 히에로니무스 보쉬와 미켈란젤로만 남았다.

부제의 작명법은 거장에 대한 섬뜩한 진실을 야심차게 드러낼 것처럼 기대감을 갖게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거의 사기에 가깝다. 다큐멘터리가 주제로서 담아내고 있는 전시 자체는 내셔널갤러리에서 2015년 10월 7일 부터 2016년 1월 10일까지 진행된 ‘고야: 초상화들(Goya: The Portraits)’ 특별전이다. 이 주제 자체가 고야의 커리어 초기 및 성기를 대표하는 왕가와 귀족 초상화들이 주로 등장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실제로도 영상의 분량 상 고야가 말년에 이르러 내면 세계에 침전해 들어간 시기는 매우 적은 비중이다. 진정 고야의 ‘살과 피의 환상’을 들여다 보고 싶다면, 적어도 1808년 프랑스 침공에서 영감을 받은 역사화들과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 귀머거리의 집)에 입주한 1819년 이후의 벽화들을 중점적으로 다뤄야 하는데, 영상에서 이 시기는 후반부에 스쳐가듯이 언급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이 영상의 부제는 자극적이고 음울한 비밀을 파해치기 좋아하는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한 지극히 전략적인 선택으로 사료된다. 또한 이러한 전략은 ‘광기어린 천재’의 신화를 맹목적으로 애호하는 대중의 기호와 맞닿아 있음이 자명하다.

영상의 최종적인 결론은 내셔널 갤러리 관장 Gabriele Finaldi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요지는 ‘다차원적인 인격체로서의 고야를 이해하고 존중하라’는 것이다. ‘내셔널 갤러리 관장’이라는 윤기나는 명함을 소지한 동시대 서양미술(사학)계의 거물이 왜 이런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연해서 인사치레성 인터뷰가 아닌, 적극적인 큐레이터 역할까지 수행했는지 다소 의아스러웠으나, 갤러리 홈페이지에 쓰여진 약식 약력을 읽어보니 완전히 수긍이 갔다.

(참고) 내셔널 갤러리 관장 소개

Gabriele Finaldi has been Director of the National Gallery since August 2015

Dr Finaldi was previously Deputy Director for Collections and Research at the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a position he took up in 2002.

Prior to his role at the Prado, he was a curator at the National Gallery between 1992 and 2002 where he was responsible for the later Italian paintings in the collection (Caravaggio to Canaletto) and the Spanish collection (Bermejo to Goya).

Born in London in 1965, Gabriele Finaldi studied art history at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where he completed his doctorate in 1995 on the 17th-century Spanish painter who worked in Italy, Jusepe de Ribera.

He has curated exhibitions in Britain, Spain, Italy, and Belgium and he has written catalogues and scholarly articles on Velázquez and Zurbarán, on Italian Baroque painting, on religious iconography, and on Picasso.

https://www.nationalgallery.org.uk/about-us/organisation/director

그는 해당 갤러리의 총 책임자이며, 동시에 고야의 진면모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적임자로서 스스로를 지목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스스로의 민족적 정체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의 마지막 큐레이팅은 대강, ‘테피스트리 밑그림과 왕실 초상화에서부터 재단화 및 초현실적 역사화를 아울렀던, 전원생활과 사냥과 동물을 좋아했던, 달콤한 초콜릿을 즐겨 먹었던, 부르봉 왕가와 프랑스 침략군 사령관을 모두 그렸던, 민족적 자긍심을 지님과 동시에 철저한 왕당파였던, 즉 다층적인 인간으로서 고야의 면모들을 기억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큐멘터리의 이러한 주제의식은 빈센트 반 고흐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거기서도 광기어린, 스스로 귀를 자른, 비극적으로 자살한, 요절한 천재인 반 고흐의 신화를 벗겨내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었다.

제작진이 이러한 메시지에 동어반복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이다. 조금만 뒤적거려도 미술에 대한 책, 영상, 강연, 블로그를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야말로 미술 담론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동시대 딜레땅뜨에게는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경계의식이 필요하다. 오늘날 반 고흐의 편지 원본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는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서 반 고흐를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로 다시 옮겨질 때, 원전의 관념은 깎이고, 덧붙여지고, 파괴되고, 변용한다. 여기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아는 대로 보는’ 우리의 지각습관이 결부되면 파편적/개별적/독립적 개체들은 겉잡을 수 없이 뭉뚱그려지고 만다.

우리가 필부필부인지라, 데리다나 푸코처럼 해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성적 주체로서 사유하면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면, 나름대로의 역량 내에서 ‘철저한 읽기’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의심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경청하는 것 정도라도 반복적으로 시도하면서 습성화한다면, 지금보다는 더 넓은 사유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도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박제된 천재, 스페인 왕가 미술의 표상으로서 고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을 살았다. 먹고, 마시고, 자고, 싸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이야기하고, 그렸다.

모든 예술가들에게 나 자신과 똑같은 차원의 다층적 인격체를 부여하고서야 비로소 그 작품을 본격적으로 음미하는 것. 그것이 우리 딜레땅뜨들이 한 차원 더 높은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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