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귀에 너무나도 선명히 남아 있는 ‘에르미타주’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예르미타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품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현지 발음을 최대한 준용하는 것이 최근의 한글 표기 경향인 것은 알지만, 예르미타시가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익숙해져야겠지.
이번 전시는 상당히 영리하게 테마를 잡고 있다. 18~20세기 초반까지 미술계의 패권국가였던 프랑스 미술을 다루면서도, 작품들의 소장처는 프랑스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신비함을 감추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이다. 세계 주요 미술관들이 유럽 여행의 핵심 거점마다 분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예르미타시는 컬렉션 규모나 중요도에 비하여 찾아 가기 어려운 곳이다. 정말 예르미타시를 목적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좀처럼 마음먹고 가기 힘든 곳이다. 이렇게 소장처의 희소성과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도가 결합된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관람료는 영화 티켓 값의 절반 수준인 단 돈 6,000원! 작품 수도 89개로 적지 않은데! 힘 있는 국가 기관의 예술 진흥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시는 고전주의, 로코코 및 계몽주의, 혁명기 및 낭만주의, 인상주의와 그 이후 등 교과서적인 시대별 구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캔버스 유화이고, 일부 청동상과 소묘가 출품되었다. 17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의 살아있는 규준이었던 니콜라 푸생이 이번 전시의 마케팅에 적극 동원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단 두 개에 그쳤고, 출품작의 수준이 훌륭한 편은 아닌지라 오히려 미술 입문자들에게 그의 명성을 갉아 먹는 결과로 귀착될까봐 우려가 든다. 그의 이름을 전면에 걸기 위해서는 그래도 그리스-로마 주제의 역사화 하나 정도는 와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동 시대의 또 다른 대표자인 클로드 로랭의 작품들은 그의 전성기 주제를 대표하는 빼어난 작품들이 제시되어 다행이었다. 고전적 건축물의 폐허들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목가적 풍경화는 당대 귀족과 왕족들이 추구했던 이상화된 자연이 어떤 모습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역시 나의 확고한 취향은 신고전주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특히 장 레옹 제롬의 「노예 시장」에서 보이는 완벽한 표면 마감은 절정에 다다른 대가의 회화 기술에 대한 존경심을 자아냈다. 도판으로 자주 보던 작품이지만, 실제로 보면 디지털의 힘을 입은 그 어떤 도판 보다도 더 선명하고 완벽한 조형성을 보여주는지라 더욱 감탄하게 된다. 작품을 보면 제롬이 어떤 불손한 주제의식과 관음증,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작품에 접근했는지는 굳이 따지고 싶지도 않게 된다. 노예 구매자들이 절박하게 뻗은 손등의 정맥 마저도 너무나 생생한 까닭에, 매끄러운 육체에 대한 갈망으로 팔딱팔딱 뛰는 그들의 거친 심장박동 마저 고스란히 보여줄 것만 같다.

루이 레오폴트 부왈리의 「당구시합」은 긴장감과 균형미가 조화를 이룬 탁월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군중은 대칭을 이루지만 전체적인 시선은 대각선에서, 약간은 삐딱하게 현장을 관조하며 관람객의 관음증을 자극한다. 그리스 여신상을 연상케 하는 풍만한 육체의 여성들은 굴곡이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신사들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듯 게임에 몰두한다. 방 안을 가득 매운 사람들은 시선의 환락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보고 있지 않은 척 하지만 모두 서로를 보고 있다. 그것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 심지어 개들에게도 적용된다. 성적 긴장감으로 팽배한 이 공간을 조금만 벗어나면 차마 눈 뜨고 못 볼, 그러나 절대로 눈을 못 땔 비릿한 향연들이 펼쳐지고 있을 것만 같다.

프랑수아마리우스 그라네의 「로마 바르베리니 광장의 카푸친 교회 성가대석 내부」는 높이 175cm로 큰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크기보다 더 커 보인다. 어둡게 처리된 가장자리가 미지의 공간이 무한히 연결되어 펼쳐져 있을 것 같은 암시를 준다. 그저 어둑어둑하고 조용한 성당의 내부를 가치중립적으로 관조한 것 같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대칭적 구도와 원, 직선, 소실점에 의한 기하학에 의하여 고도의 정신성이 포착되어 있다. 사람보다는 빛이 주인공 역할을 하는 이 작품에서는 단순함과 명료함이 보여주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쥘 조제프 르페브르의 「작은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는 다분히 불순한 의도로 그려진 작품이지만, 규범이 되어버린 빨간색 긴 머리와 ‘막달라 마리아’라는 제목의 요식행위를 바탕으로 그 의도를 희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때 쯤이면 이미 이 정도 눈가리고 아웅은 귀엽게 봐 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은 매끄러운 육체와 거친 바닥의 질감이 대조를 이루며 소위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여인에게 온건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녀의 배 위에서 아스라이 부서지는 빛이 구원의 빛인지, 쾌락의 빛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아름다운 것만은 분명하다.

장 레옹 제롬의 작품은 저 공격적인 남성들의 손짓이 보기 불편한 광경이었지만, 과거의 사건들을 지금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색감이 어찌 저리 선명한지 리얼한 작가의 솜씨에는 놀랐습니다. 역시 고전 미술은 실물을 영접해야 감동이 오네요. 글 잘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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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사건인 것 처럼 꾸며 놓고 거기다 자신의 현재 욕망을 투영하는’이 맞을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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