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래의 「미술과 문학의 파타피지컬리즘: 욕망하는 미술, 유혹하는 문학(2017)」

미술과 철학을 통시적/공시적으로 아우르는 「미술철학사」를 내놓았던 이광래 교수가 쉬지도 않고 1년 만에 다시 들고 나온 책이다. 전작이 3권, 총 2,656페이지의 어마어마한 양을 과시했던 것을 감안하면 624페이지의 이 책은 차라리 겸손해 보인다. 하지만 그 물리적 존재감은 전작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파타피지컬리즘’이라는 생소한 이름표를 달고 더욱 위압적으로 우리를 내려다 본다.

파타피지컬리즘은 알프레드 자리의 pataphysique에서 따온 용어로, 형이상학과 대척점에 있는 ‘통섭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적폐세력’으로 간주하고 해체를 들고 나왔다면, 이광래는 통섭을 들고 나온 것이다. 해체가 신과 인간, 삶과 죽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그 시원까지 파고 들어가며 무의미한 것으로 증명해버린 것이라면, 파타피지컬리즘은 반대로 모든 대척점을 가로 지르며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문학(신화)과 미술의 통섭사를 조망하며 서로 다른 두 분야의 위대한 창조자들이 왜 서로를 욕망했는지, 그 욕망의 결과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밝힌다.

책은 친절하지 않다. 통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나열했다면 단조로웠을망정 이해도는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연대기적 서술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신화와 문학을 욕망한 미술가들의 이야기와 창작의 원천이 되었던 위대한 문인들의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1장 욕망하는 미술’과 ‘2장 유혹하는 문학’은 저자 나름대로의 기준에 의하여 구분된 것이겠지만 딱히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결국 미술이 문학에서 조형의 원천을 찾은 것은, 미술이 욕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문학이 유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술의 욕망과 문학의 유혹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밝혀 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예술 작품의 탄생은 선형적인 인과관계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아주 길고 촘촘하게 설명한 미술과 문학의 파타피지컬리즘은 사실 아주 단순한 창작의 원리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 일종의 ‘말 잔치’ 일 수도 있다. 그 단순한 원리란, 작가의 순전한 내면에서 길어올리는 창조의 샘물은 늘 생각보다 더 일찍 그 바닥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경험의 너비와 폭이 확장될수록, 즉 외부로부터의 정보량이 증가할수록 내면의 빈곤은 그 명암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법이다. 종이, 인쇄술, 전기통신, 인터넷 등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기하급수적인 정보량의 확대로 이어졌고, 예술가들의 장르를 가로지르는 창작 욕망도 그에 비례하여 확장되었다.

새로운 창작의 원천이 새로운 작품을 낳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다만, 그러한 통섭을 누구보다 활발히 전개하여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미적 쾌감을 선사했던 예술적 이종교배의 선구자들은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마티스, 윌리엄 블레이크, 말라르메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통섭가로서 말라르메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말라르메는 19세기 말의 문단을 주도하며 자연스럽게 ‘화요회’의 구심점이 되었는데, 이 집단은 말라르메를 추종하던 문화예술엘리트들이 그의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경청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 모임을 통해 말라르메를 중심으로 문인, 화가, 음악가, 과학자 등 분야를 초월한 광범위한 명사들이 모여 통섭적 관계망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미술은 문학으로, 문학은 미술로, 그리고 다시 음악으로 욕망의 가로지르기가 활성화 되었고, 그 결과물들은 근대에서 현대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문예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저자는 니체가 ‘초인’을 기다리듯, 통섭적 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新 말라르메’의 등장을 고대하는 것 같다.

「미술철학사」에서도 확인했듯, 저자의 언설 저변에 깔려 있는 미적 판단의 기준 중 하나는 ‘미술가의 인문학적 역량과 자세’이다. 역사에 대한 남다른 인식과 실천력, 풍성한 인문학적 지식, 고양된 사상적 기반을 갖추어야만 훌륭한 미술가가 되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결코 그럴리 없다’라는 것만 되새기며 읽는다면,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매우 유익한 통섭적 지식습득의 기회가 될 것이다.


지난 여름에 예스24의 ‘예술이다, 이 책’ 이벤트에 응모해서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예술 분야 책을 추천하는 그 이벤트에서 「메디치」를 추천해서 선정된 것이다. 나의「미술철학사」 리뷰도 ‘이 주의 리뷰’로 선정되어 상품권을 받은 바 있다. 앞으로도 예스24와의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앞으로도 예스24에서 나에게 선물을 많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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