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원장

치과에서 진료를 보고 나오는데, 입구 벽면에 원장 세 명의 화려한 약력이 적힌 현판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그 치과는 세 명의 동문 원장이 운영하는 곳인데, 그 중 한 명이 대표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무릇 장(長)이라 함은 조직의 우두머리이다.  머리가 세 개인 케르베로스가 신화 속 허구의 존재이듯, 대체로 ‘우두머리’로 불릴 수 있는 존재는 최정점에 있는 단 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세 명의 원장과 그 중 한 명인 대표원장으로 구성된 치과는 로마 제국의 삼두정치마냥 불안한 공존으로 느껴진다.

아마 치과는 동업자 정신에 입각한 세 명의 의사들에게 동등한 수준의 존중과 권위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등한 수준의 존중은 상향평준화가 아닌 하향평준화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지위의 인플레이션은 곧 지위의 디플레이션과도 동의어인 것이다.

지위의 인플레이션을 일반 기업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영업직처럼 대외적으로 고객과 접점에서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직원들에게 통상 부여되는 것보다 더 높은 직위를 부여하곤 한다. 보다 당당하게 협상에 나서고,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사원’이라는 직위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 입사하자마자 ‘주임’을 달고, 대외적인 명함은 거기서 한 단계 더 격상해서 ‘대리’로 파는 것도 보았다.

‘격상’은 남들이 가만히 있을 때라야 비로소 그 가치가 증명되는 법이다. 다들 사교육 시킨다고 내 자식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학원을 보내듯, 남들의 격상에 발을 맞추면 나도 덩달아 올라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상은 그저 남처럼 된 것 뿐이다. 오히려 학원을 가지 않고 명문대학에 가는 것이 진정한 ‘격상’이다.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따로 과외나 학원은 안다니고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는 수석 합격생의 인터뷰 발언은 다른 길을 통한 격상의 가치를 아는 자의 모범답안인 것이다.

세 명의 원장은 지위의 인플레이션이 역설적으로 지위의 디플레이션을 초래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나를 담당하신 분이 원장이라는 명함을 주었을때, 내 가슴은 확고한 신뢰로 가득찼지만, 치과를 나오면서 그 치과가 세 명의 원장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나를 담당하신 분은 대표원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뜨거웠던 신뢰는 차가운 냉소로 급격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한 10년 쯤 지나서, 원장이라는 호칭을 모든 치과의사가 갖게 되는 그 날에, 전원이 대표원장이고 그 중 한 명만 대왕대표원장인 치과도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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