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The Shape of Water, 2017)

※ 스포일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농후함

“Shape”와 “Save”와 “Shave”를 혼동하는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위하여 친절한 부제를 달아 놓은 작품이지만, 정작 세세한 작품 속 장치들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한 번의 감상으로 부족할지도 모른다. 출생의 비밀, 아가미, 인어, 외로움, 수중 자위행위 등 두 존재가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여러 층위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나, 결국 그들의 사랑은 가슴 보다는 머리로 이해해야 했다. 하긴, 두 존재의 환상적인 베드신, 그 영화사적으로 유례 없는 찬란한 순간마저 이웃주민의 민원과 각종 가재도구의 사후 정리에 대한 걱정으로 온전히 즐기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정치적 올바름’이 학계를 넘어 범용적 시사용어로까지 대두된 것이 불과 4~5년 사이였던 것 같은데, 벌써 그 한계가 인종, 국적, 종교, 성적지향성을 뛰어 넘어 이종(異種)─비록 두 존재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종이 아님은 여러 차례 암시되고 있지만─간의 사랑으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은 가히 놀랍다. 물론 수간마저 동조하는 수준의 ‘정치적 올바름’을 대중 상영관에서 옹호하기까지 걸릴 시간은 수 십 년도 더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간절하게 믿고 있다.

이런 질문을 해 본다.

  1.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성교는 수간인가, 아닌가?
  2.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를 범했다면 수간인가, 아닌가?
  3. 질문 1과 2의 답이 동시에 “수간이다” 일 수 있는가?
  4. 질문 1과 2의 답이 동시에 “아니오”일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엘라이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첫 단추가 되겠지만, 연출자가 그 답을 알려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작가의 의도는 작품의 여러 의미 중 하나일 뿐이며, 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대화라는 현대 미학의 관점이 타당하다면, 그리고 ‘작가의 죽음’을 선언한 롤랑 바르트가 옳다면, 결국 이 질문의 답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내 마음 속에서는 엘라이자가 진정한 승리자, 다만 본인이 승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가련한 불운의 승리자라는 결론이 자리를 잡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러한 첨예한 문제들이 전혀 감상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연출, 기술, 연기의 조화가 훌륭한 영화이다. 어쩌면 진정한 대가의 기준은 찢어버리고 싶은 시놉시스로도 명작을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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