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의 「한국 동시대 미술 1998 – 2009(2018)」

반이정의 「한국 동시대 미술 1998 – 2009」는 트렌디한 기획의 산물이다. 일단 작고, 가볍고, 예쁘다. 또한 명료한 소제목으로 구성된 짧막한 글단위들은 ‘만성적 긴 글 알러지’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위한 친절한 배려이다.

저자의 블로그를 통해 이 책의 기획안을 접했을때, 연도별로 주제를 뽑아내는 구성에 대해 우려를 감출 길 없었다. 한 개 연도가 한 개 주제로 축약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공시적으로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지만 3개 연도쯤 넘어가니, 한 개 연도에서 추출한 하나의 주제는 단지 큰 흐름을 조망하기 위한 하나의 마중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1998년부터 2009년까지의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 짧은 역사를 이끌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시장, 아뜰리에, 경매장 등 미술계 현장의 땀냄새가 눅눅히 배어 있는 기록이다. 연도별로 가장 중요한 트렌드를 하나의 핵심 주제로 끄집어 내어 관련된 작가들과 작품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목차만 얼핏보면 통시적 연대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특정 연도에서 도출된 주제에 얽힌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해당 연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전후사정과 인과관계의 사슬로 엮어낸다. 그래서 저자와 함께 숨가쁘게 12년 간의 여정을 마치고 나면, 우리나라 동시대 미술의 통시적/공시적 씨줄과 날줄이 머리 속에 촘촘하게 개켜지는 기분이 든다.

저자 반이정은 화가인 누나의 영향으로 뒤늦게 미술계에 뛰어든 비실기인 출신 미술평론가이다. 자전거 마니아와 네이버 파워 블로거로도 유명한 그의 이름은 미술계 안팎에서 쉽게 눈에 띈다. 특히 크고 작은 미술계의 이슈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그의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어떤 미술계 현안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나만의 관점을 가져보려는 생각에 이런저런 웹페이지를 타고 다니던 중 마침내 그의 그 유명한 블로그에 당도하였다. 거기서 그가 미술계 이슈들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 놓은 카테고리에 이르러, 나는 그의 블로그를 내 첫 팔로우 리스트로 등재시켰다. 그가 조영남 대작 사건, 일베 조각상 사건, 서울로 슈즈트리 사건 등에 대하여 밝힌 구체적인 입장들이 내가 암암리에 가지고 있던 견해와 너무나도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마치 내 생각을 그가 대신 써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후 그의 블로그 글을 부지런히 받아 보고, 그가 공저로 참여한 「나는 어떻게 쓰는가」도 찾아 읽으면서 더욱 많은 공감대를 느꼈다.

그의 단독 저술은 이번에 처음으로 읽은 것이다. 눈치 보지 않으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열린 사고와 시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는 책이다. 미술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상을 미술계의 변화에 연결시키는 감각이 섬세하고 예민하며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시대의 조류와 거대담론, 혹은 단편적인 해프닝들이 미술계의 지형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서고에 쟁여 놓을 필요가 있다.

이 책에 등장한 이름들을 다시 한번 눈여겨 보아야겠다. 언젠가 현장에서 그들의 작품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건내면서 그 속에서 나만의 편향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다.

12년쯤 후에 또 다시 그 때의 ‘한국 동시대 미술’이 정리된 결과를 꼭 만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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