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티어의 「베네치아 미술: 빛과 색채의 향연(출1970, 역2003)」

피렌체와 로마의 미술은 감동을 주는 반면, 베네치아 미술은 사람을 현혹시킨다. 감동과 현혹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머리를 거치는가, 거치지 않는가 정도의 차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각할 수 없는 사이 강한 끌림으로 매료시키는 힘이 베네치아 회화에 있다. 흔히 회화적, 감각적이라고 표현하는 베네치아 미술은 그저 특정 지역의 주된 미술 경향이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독보적인 양식상의 특수성과 내면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베네치아 회화의 전성기는 짧고도 강렬했으며, 바로크, 로코코, 낭만주의, 인상주의로 이어지는 감각적인 양식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색채의 혁명을 예견하였다.

저자인 존 스티어는 베네치아 미술의 독특한 형성배경을 비잔틴 미술의 흡수가 용이한 입지적 특성과 물로 둘러싸인 환경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13세기 비잔틴 미술의 물질적 화려함은 이탈리아 대륙의 입구이자 십자군의 전초기지인 베네치아를 통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전이되었다. 또한 풍성하게 쏟아지는 햇살은 찰랑이는 수중에서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늘상 대기를 감도는 촉촉한 물안개와 소금기로 인해 부식된 건물의 바랜 색채는 빛과 색에 대한 기민한 감각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일찍부터 발달한 해상교역의 영향으로 은근히 과시적인 시민계급의 세속적 가치가 그 어느 지역보다 노골적으로 표상될 수 있었다는 점도 베네치아 미술의 독특한 양식과 미술사적 지위를 만들어낸 동력이었을 것이다.

책은 베네치아 미술의 형성배경과 500여년의 짧은 흥망성쇠를 시대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지면은 찬사가 마땅한 파올로 베네치아노, 조반니 벨리니, 티치아노, 틴토레토, 파올로 베로네세, 카날레토에게 편파적으로 할애되었으며, 그 밖의 화가들은 거의 언급에만 급급한 수준이다. 216페이지의 짧막한 총서류라는 것을 감안하면 응당 수긍할만한 수준의 깊이이다. 그럼에도 각 대가들의 관계를 통시적, 공시적으로 얽어매려는 노력은 포기하지 않고 있기에, 큰 흐름을 조망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는 유용한 수준이다.

칭찬할만한 점은, 평론서가 아닌 역사서의 형태를 띄고 있음에도 예상외로 작품을 묘사하고 판단하는 영역에서 저자와 역자의 준수한 역량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림의 어떠한 부분을 눈여겨 보아야하는지, 당대의 보편적 수준에 비추어 어떠한 가치를 지닌 작품인 것인지, 역사를 떠나 어떠한 미적 취미를 충족시키는 것인지 설명하는 서술들은 확실히 평범한 미술사가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짧은 분량에 175개의 도판을 실어야 하는 촘촘함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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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니 후기 양식은 비센차에 있는 산 코로나의 대작 <그리스도의 세례>가 그려진 1501년에서 1502년에 이미 완성되었다. (중략) 이 작품에서 색에 대한 베네치아적 감각은 시각 경험에 대한 새로운 방법과 결합되어, 베네치아 회회의 전통적인 관심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형태로 재조직되었다. 인공적인 선을 버리고 벨리니는 이제 세상을 순수한 색면으로 시각화했다.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형태는 대조적이지만 서로 연결된 색면들로 이루어지고, 색과 형태 사이의 놀라운 유비로 인해 전체 그림은 마치 색채의 양탄자나 벽걸이 같이 긴밀한 짜임새를 보인다. (중략) 그는 공간을 거부하지 않고 다만 더욱 직접적인 시각 기능의 작용을 통해 그것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후경과 전경은 망막에서처럼 화면에서 하나가 되며, 공간은 바로 그 지각 경험처럼 풍부하고 모호하게 경험된다. -69~70p

이러한 서술은 문체가 유려할뿐만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작품의 외형적 특징, 미술사적 의의, 화가의 내밀한 관심사까지 상세히 드러냄으로써 자칫 이지적이기 쉬운 역사서의 딱딱함을 완화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세례>가 세잔풍으로 공간을 재구조화한 혁신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선원근법의 지나치게 이성적인 접근방식에 대한 지각심리학적 관점의 회의에 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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