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체에서 따뜻하고 풍요로운 생명의 물에 푹 잠겨 있다가 불가항력적으로 세상에 나온다. 태어나 처음으로 맛보는 슬픔은 물로부터의 처절한 분리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죽어가는 과정은 물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피부는 거칠어지고, 혈관은 좁아진다. 주검은 모든 구멍을 통해 물과 피를 분출한다. 결국 죽어가는 과정은 메말라가는 과정이다.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김수호의 개인전이 문래동 space 9에서 열렸다. ‘장지에 분채’라는 잊혀져가는 기법을 일관되게 적용한 17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작가는 분채를 이겨 장지에 켜켜이 덧바르는 기법으로 축축히 젖었다가 자연스럽게 말라붙은 물성을 만들어냈다. 한 때는 젖어있었던 것이 분명한 존재의 메마른 현재를 묵도한다. 결국 그의 작품은 주검의 현현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세상에 놓여졌고,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서 클로즈업된 육체는 피와 살과 뼈의 역력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상기시킨다. 별도의 표구과정 없이, 장지의 여백을 액자로 삼은 작품들은 오래된 목조 지붕아래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마저도 실존의 가벼움을 은유하는 것 같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