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展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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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리미널리티(liminality)의 공간이다. 이는 우리가 호흡하고, 먹고, 마시는 현실과 다소 거리를 둔, 미(美)와 지(知)의 세계로 들어가는 전이 지대를 의미한다. 무심한 눈빛들만 가득한 거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광장과 정원, 조각상과 열주를 전방에 내세우고, 그 심연에 일상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있는 것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그 안에 들어서면 문화권 내의 보편적인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찬사를 받기 합당하며, 배우고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다수가 입을 모아 주장한 것들이 고고한 자세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찾기 위해서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시끄러운 시위꾼들과 다국적 관광객들의 셀카봉 공세를 뚫고 덕수궁 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시위꾼과 관광객들을 피해 아예 정문으로부터 저만치 돌아 지나가곤 하는 대다수의 바쁜 행인들은 그 궁궐 안에 현대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른다. 용기를 내어 정문을 통과하면 고즈덕한 궁궐 풍경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미술관까지 당도할 수 있겠지만, 비가 오는 날이라면 포장되지 않은 진흙길을 밟는 수고를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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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면 이런 녀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찾을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편애하는 이 미술관은 고궁을 앞마당 삼는 호사를 부리며 도심으로부터 괴리되어 완벽한 리미널리티 효과를 창출한다. 고궁을 걸어 가는 과정에서부터 이내 마음이 평온해지며 미의 세계로 들어갈 심리적 여건이 조성된다. 코린트식 주두를 앞세운 고전양식의 3층 건물은 방문객을 지나치게 위압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기품을 내비친다. ‘국립’ 미술관으로서는 다소 좁아보이지만, 일단 들어가 보면 90~130점 정도의 작품을 선보이는 하나의 특별전에 온전히 집중하는데 최적의 규모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크게 네 개로 분할된 전시 공간을 유영하는 동안, 묵직한 건축물의 공간감이 진공상태를 창출하며 내면과 작품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동선의 사이사이에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온화한 빛과 부유하는 먼지, 그리고 미세한 소음이 외부 세계와의 공존을 새삼 자각하게 한다.

이곳을 처음 찾았던 계기는 2014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열렸던 「조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di) 展」이었다. 누군가에 이끌리어 별 생각없이 전시를 관람했던 그때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지 몰랐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모란디의 집념어린 정물들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고, 그와 인연이 닿았던 장소인 덕수궁관도 더욱 특별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관람했던 덕수궁관의 「이집트 초현실주의 展」, 「신여성 展」 등도 기획의 우수성과 미술관 자체의 특징적 요소들이 맞물려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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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이번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展」은 개관 20주년, 건립 80주년을 맞아 덕수궁관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출품하는 특별한 기획이다. 즉, 미술관과 근대의 걸작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전시이다. 전시의 타이틀이 나 자신의 고백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매우 편향된 평가를 예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출품된 작품(작가)들의 면면이 이미 전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안정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호평 자체는 불가피하다고 변론하고 싶다. 따라서 이 전시의 진정한 평가는 출품된 ‘근대의 걸작’들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과적으로 그 지점에서도 성공한 전시이다.

우선 이 좁은 공간에서, 게다가 제국주의자이자 식민지배자의 시선에서 설계된 이 공간에서 관람객에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8경(景)’을 찾아보라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럽고 유치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공간 여기저기에 숨겨진 설계 의도와 시대적/문화적 가치들을 찾아보게 하고, 이 공간을 계속 주의 깊게 둘러볼 당위성을 부여해주려는 노력은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마치 RPG 게임을 수행하듯, ‘8경 중 내가 못 본 나머지는 어디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하고, 때로 ‘음… 이건 좀 억지인데?’라는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성찰을 두려워하는 대다수 관람객들에게는 성공적인 소통 전략이었다.

1부에서는 미술관 자체를 오브제 삼으며 각종 설계 도면과 청사진을 제시하고, 건축사 사무소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제도용 스탠드로 그것들을 비추도록 설계하였다. 자신이 현존하는 공간의 시원성을 엿볼 수 있게 하면서 지적 관음증을 건드리는데도 성공하였다. 크리스탈 입면체로 단순화하여 재구성한 건물 모형도 공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매체였다. 이처럼 미술관을 작품화하는 전략은 마지막 6부의 <건축무한 증식기하(2018)>에서 다시금 빛을 발하는데, 덕수궁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미디어아트를 통해 공간을 해체하고 유영하는 시지각적 환영을 창출한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몰입의 경험을 통해 정교한 수학적 기획에 기반한 공간의 가치를 재인식시켜주었다. 이처럼 해당 전시만을 위한 혁신적인 형식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기획하고, 유망한 작가와 협업하고, 관람객에게 새로운 전시 경험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일방향적인 전시 경험에만 묶어 놓을 수 없는 현대의 관람객 성향을 적절히 고려한 결과이다. 전시에서 미디어 컨텐츠를 하나씩 내어 놓는 것이 일반화되는 최근 추세에 비추어 볼 때에도 모범적인 사례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미술관이 개최했던 전시들에 관련한 사료들은 예술업에 낭만을 품고 있는 관람객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될 것 같다. 특히 5부 초입에 제시된 그간의 도록들은 내가 찾았던 전시들을 복기하게 해주며 ‘그 순간에 내가 있었다’는 존재 의식을 다시금 상기시켜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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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 공간의 스테인레스 재떨이는 실용적인 기능을 상실한, 개관 당시로 돌아가게 하는 타임캡슐 역할만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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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식 주두를 볼때마다 그것을 파내는 자의 수고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2.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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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버트 보스의 <서울 풍경(1898)>은 서구적 시선으로 바라 본 우리 민족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주로 전통적인 산수화나 민화로 보던 당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모든 개체를 아우르려는, 단일한 시점의, 내려다보는 보스의 시선에서 기록, 통합, 학습을 강조하는 서구의 제국주의적이면서도 계몽주의적인 관점이 드러난다. 멈추어버린 시간 속의 서울 풍경은 적막하고 황량하기 그지 없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다가오는 역사의 변혁과 수난을 예고하는 듯한 무거운 정적만이 저 먼 능선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침전한다. 정면에 보이는 집 안 마당에 비루하게 솟은 한 그루 꽃 나무만이 그 곳에 누군가 있음을, 생명이 있음을, 역동하는 영혼이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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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봉의 <국화(1975>는 제목인 국화보다 그것을 품고 있는 도자기에 더 눈이 간다. 국화는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평면적이지만, 도자기는 두 개의 탐스러운 봉우리를 강조하며 입체성을 강조한다. 왼쪽 상단에서 떨어진 빛은 봉우리를 강조하며 차가운 도자기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회갈색조의 바닥과 배경도 두 개의 평면으로 환원되며 도자기의 굴곡을 더욱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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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외침, 수탈, 압제, 그리고 동족상잔의 아픔 속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는 국지적인 디아스포라의 흔적으로 점철되었다. 씨족 마을의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이향(離鄕)은 이방인과 배척의 탄생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지난한 개간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김세용의 <이향(연도미상)>은 애끓는 심정으로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의 허망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고통은 표정을 일그러뜨리지만, 거기서 더 나아간 내면의 고통은 오히려 표정의 무(無)를 야기한다. 이향의 역사에서 여인과 아이의 운명은 표정을 앗아가는 수준의 고난으로 이어졌던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이렇듯 시대에 등 떠밀려진 예측할 수 없는 한 가족의 운명은 화면 우측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가장의 뒷모습만큼이나 막막하다. 강을 유영하는 작은 돛 배 조차 그 반대편에 있는 여린 소녀와 업힌 아이에 대응하며 정처 없는 한 가족의 떠밀림을 강조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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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展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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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갠적으로 덕수궁 미술관의 시작이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설계도면 사료 등을 한 데 모아놓은 것을 보는 건 또 쉽지 않은 기회라 흥미롭기도 했어요. 13년도 덕수궁 미술관에서 했던 ‘한국 근현대회화 100선’전이 생각나기도 하면서…암튼 편하고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샤갈전에서 받았던 상처가 조금 치유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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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ㅎㅎ 저도 샤갈전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업’에 로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재탕 삼탕이 많긴 했지만, 이 작품들로 전시가 실패한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이겠죠. 역시 전시의 본질은 작품이다! 다시 한번 깨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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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서론 부분에 있어 덕수궁 미술관으로 향하는 경험에 있어 스트레스가 많으셨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근대의 걸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개가 되었으나 그 당시의 세계미술의 발전 과정과 우리나라의 근대 미술작품을 함께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저는 덕수궁관에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해서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했고 입장한 직후 덕수궁관의 설계도 등은 지루해서 바로 그림으로 뛰었어요. 같이 본 어떤 분은 큐레이팅에있어 감정이입이 되는 그림들을 앞에 전시하며 좋았겠다-라고 했는데 그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에요.
    이라는 작품은 저도 인상깊게 봤는데 근대사의 역사를 떠올리며 그 작품을 보면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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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획과 작품이 모두 좋은 전시였죠. 우리나라 미술의 근대화(=세계화or유럽화) 과정은 대체로 일본유학파들에 의해 주도된 경향이 있어서 ‘미국/유럽-일본-한국’의 경로를 주목하는게 좋을 겁니다. 사실 제도, 문화, 학문의 상당수가 그 경로를 탔죠.
      저는 예전에 건축 제도를 배운적이 있어서 그런지 설계도가 재밌었는데 별로였나 보군요. ㅎㅎ 좀 자화자찬적인 경향이 없잖아 있었죠. 그래도 전시 취지에는 부합했다고 봅니다.
      작품명이 사라졌는데, 아마 괄호 때문인것 같군요. ‘이향’에 대한 언급인가 보군요. 우리네 민초들의 삶, 특히 아낙과 소녀들의 삶은 얼마나 헌신적/희생적이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되는 작품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동생을 업은 어린 소녀’의 이미지가 반복되는데, 이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또 모성애를 가져야 하고, 앞으로도 어미로서 그런 것을 반복해야 한다는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능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염두할 필요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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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리나라의 근대미술을 보면 일본유학파가 주도한 경향이 있으나, 그 참고한 일본의 화풍도 서양에서 가져온 것이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릴 때 결국 서구권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서양화를 우리나라가 껍데기만 카피했다는 지점이 많이 아쉬워요..ㅠ 미술사의 중심이 파리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던 시점에 김환기가 파리로 이동한 것도 많이 아쉽구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부분은 저도 공부를 해야할 것같아요. 페미니즘을 공부해야하는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느끼고있는데 막상 제가 공부해야하는 것부터 해결하는 것이 벅차네요.

      건축하니 생각나는데 국현에서 현대건축전시 보셨나요? 열심히보려고했으나 도저히 열심을 낼 수없어서 올해의 작가상 전시보러 갔었네요~ 국현은 요즘같은 여름에 시원하고 표가격도 저렴하고 좋은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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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든 문화의 전파는 왜곡과 깎여나감이 수반되는 것이지요. 그 절삭을 채워 넣는 과정에서 독창적이고 새로운 아름다움이 창출되기도 하고요. 하이데거는 서구 사상이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 위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했는데, 그 왜곡과 오독 마저도 인류의 발달사를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있다고 하는 학자도 있지요. 파노프스키도 오류가 진실만큼 중요하다고 했더군요.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미니즘을 별도로 공부하기 어렵다면, 미술사/미술비평과 연계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사실 미술사/비평계의 여성들 대부분이 페미니즘 관점을 비평적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구요(로잘린드 크라우스 제외). 린다 노클린, 바바라 크루거, 주디스 버틀러 같은 이름이 떠오르네요.

        현대건축전시는 관심분야가 아닌지라 안봤는데… 저도 올해의 작가상은 놓치지 않고 봅니다. 누가 선정될지 맞추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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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네 ~ 다른 화풍을 수용해서 자기색을 입혀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좋은데. 가령 피카소는 당시에 유행했던 여러가지 경향을 흡수하기도 했던 것처럼요.

        70년대의 단색화도 그렇고 서구의 화풍을 수용함에 있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그려냈냐에 대해서는 의문이에요. 국내에서는 호평을 받았을지 몰라도, 단색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도 꽤 있고 정작 세계에 내놓았을때는 반응이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서구의 추상과 어떤차이가 있으며 어떤점에서 한국성이 있냐는 관점에서요.

        물론 이불. 서도호, 김수자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들도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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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습합적 창조’라는게 그리 쉬웠다면 우리가 피카소나 호안 미로 같은 사람들을 대가로 모시지 않았겠죠. 보편적 미술계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또 일개 개인으로서 나름의 취향과 재미를 찾아가려는 노력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게 딜레땅띠즘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단색화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데, 이게 서구적 시선에서 ‘동양적 신비주의’, ‘서구적 세속성에서 벗어난 고도의 정신세계’라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지요. 이런건 사실 서구 중심적 미술계에서의 타자화,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일 수도 있거든요. 하나의 작품, 하나의 사조에도 사유의 실마리들은 무궁무진하죠. 공부에 끝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ㅎㅎ 그래도 서연님은 우리나라 미술계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을 지녀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화 사대주의자라 그런 것도 없거든요. ㅎㅎ 그저 무책임하게 즐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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