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제4회 미술사학대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캠퍼스)

미술사학대회는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두 학회인 서양미술사학회와 한국미술사학회가 매년 공동으로 주최하는 연례 학술대회이다. 4회차를 맞는 올해의 미술사학대회는 「위작, 대작, 방작, 협업 논쟁과 작가의 바른 이름」이라는 주제로 6월 9일(토)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개최되었다.

미술사에서 작가성(authority)과 원본/위작을 둘러싼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특히 2016년에 불거진 이른바 ‘조영남 대작 사건’의 법적 공방이 현재진행형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이다. 이러한 학술대회를 통해 다양한 식견을 가진 연구자들이 현대 미술에 있어서 작가의 역할, 원본의 판단 기준, 복제의 가치 등에 대한 심도 있는 중지를 모은다면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작가-작품’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함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제가 품고 있는 ‘바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여기에는 마치 작가성과 원본의 논쟁에 있어서 ‘바른’ 정답이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없더라도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며, 공공연한 규준으로서 합의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서양미술사학회의 프로그램 중에서 ‘조영남 대작 사건’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논문은 2편이었다. 우정아의 「협업의 경제: 현대적인 미술의 제작 방식」과 오경미의 「되돌아보는 조영남 대작 사건: 개념미술의 오역과 통속화」가 그것이다. 두 연구자는 공통적으로 조영남의 작업은 미적 가치가 없으며, 작가적 윤리성이 결여된 ‘대작’이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기존에 조영남에게 유리한 논리들을 제공했던 진중권과 반이정을 철저히 반박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제 개별 연구자들의 연구로 조금 더 들어가보자.

우정아(2018)는 조영남이 낭만주의적 천재로서의 작가라는 아우라를 공공연하게 표방하면서 시각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누렸고, 그것이 전시와 판매라는 소기의 성과들로 이어졌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실제 작품의 제작에 있어서는 대리자의 손을 빌렸고, 그에 따르는 비판에 대해서 팝아트 및 개념미술을 표방하면서 작가적 권위를 파괴하는 시류를 따른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였다. 연구자는 개념미술의 실행자로서 조영남의 예술 개념이 뛰어나서 성과를 누렸던 것이 아니며,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으로서 일탈적인 예술가의 전형을 따르며 명성을 쌓았기 때문에 작품이 주목받은 것임을 지적하였다. 우정아는 이 대목에서 오인환 작가를 ‘조영남식 개념미술’의 반례로 제시한다. 오인환은 타자적 위치를 고수하면서 제도비판적인 개념미술의 계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개념미술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 취했던 방식들 속에서 여러 협조자들을 적극 활용하는데, 이것이 ‘협업자로서 작가’의 진정한 예시라고 보았다. 협업의 윤리적 가능성을 보여준 오인환을 통해 조영남의 비윤리성을 부각한 것이다.

이어지는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쥘) 예술가가 공공연히 표방하는 자아와 실제의 작업 방식이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 모순된다는 사실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 과정 자체는 독특한 예술 실천의 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은가?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 내가 조영남을 비판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그리지 않은 것을 그렸다고 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화단에서 입을 모아 주장하는 이야기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회자(정연심)의 정리 발언에서 나는 기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 조영남은 정규 미술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이고, 사실상 작품 활동을 한 적도 없다고 봐야 하죠.

가볍게 웃음을 유도하며 정리하려고 했던 발언이었는데, 여기에서 상당한 폭력성을 느꼈다.

오경미(2018)는 개념미술의 개념에 집중하였다. 진중권, 반이정 등이 개념미술을 오역하여 조영남에게 면죄부를 씌워주었기 때문에 개념미술의 정의 자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은 개념미술을 정의함에 있어서 제작 방식으로서의 개념에만 집중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개념미술의 발전사를 돌이켜보면 개념미술에서의 ‘개념’은 단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구상 차원이 아니라 동시대 맥락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들을 자각한 미술인들의 비판적인 개입이었다. 또한 개념의 실질적 표현에 있어서 실행의 물리적 어려움 때문에 대리인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 대리자의 개입에서도 작가는 아이디어와 실행을 전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에 작품이 작가에게 정당하게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개념미술을 하나의 제작 방식으로 축소시키면 애초의 정치성을 잃어버리고 상품이 되기 때문에 문제라고 보았다.

이 연구에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도 나는 손을 들었다.

(쥘) 진중권이 정의한 개념미술에서 역사성과 동시대성을 간과한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였는데, 모든 역사학자는 자의적으로 역사를 인식하고 정의한다는 점에서 진중권의 정의도 그 나름의 개인적 차원에서는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또한 시대가 흐르면 역사성과 동시대성에 대한 판단은 바뀌지 않나? 다른 시대와 맥락에서, 우리 미래 세대가 조영남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재평가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나?

이에 연구자는 (답변에 시간이 소요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오) 특정 사조를 정의하는 것에 있어서 개인적 자의성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조영남은 창작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시대와 맥락이 되더라도 그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평가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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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혹은 내 연구와 관련된 연구를 접하기 위해 많은 학술대회에 참석해 보았지만, 순전히 취미로 학술대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사 관련 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행사이니만큼 미술계의 폭넓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주류 학계를 구성하는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직접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미학적인 판단의 대상 조차 될 수 없으며, 심지어 창작의 범주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학계의 합의된 견해가 아니기를 바란다. 풍요로운 예술적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시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학계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굳건한 성벽을 보았다. 서로가 학맥으로 긴밀하게 얽힌 이 좁은 나라, 좁은 학계에서, 수많은 목소리들 중 일부만을 규준으로 차용하여 대물림하고, 그 규준으로 단단한 벽돌을 굽고, 그것을 촘촘히 높게 쌓아올려 만든 성벽이다. 그 성벽 안에는 ’21세기형 新아카데미즘’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고생고생해서 이 성벽을 쌓았으니, 너희도 들어오고 싶으면 똑같이 성벽을 쌓아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성벽에 반대하고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성벽 안팎으로 너무나 무거운 침묵만이 두텁게 내려앉아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성벽 안에는 ‘윤리성’이라는 칼을 들고 고기 썰듯 예술을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고기라도 고기는 고기인데, 그런건 고기라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송기창과 구매자가 조영남의 그림이 대작이고 사기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당사자에게는 항변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미술 속에 숨겨진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오늘날의 미술 담론을 만들어간다는 사람들이 ‘그 작품은 대작이고 사기이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 조차 될 수 없다’고 한다면, 미술사에 새겨진 그 수많은 논쟁들을 뚫고서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들에게 부끄러운 증언일 것이다.

이 시대의 윤리성과 가치는 불변할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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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4회 미술사학대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캠퍼스)”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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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규교육을 받지않았기에 미학적 평가의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것에 있어서, 다른 반례가 얼마든지 있다고 봐요. 예를들어 앙리루소같은 경우도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미술사에는 이름을 남겼잖아요.
    모방이냐 대작이냐에 대해서는 저도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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