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여성과 남성, 추상과 구상, 동양화와 서양화 ─
경계를 재고하고 이내 허무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 된지 오래지만, 그러한 시도들이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은 경계가 여전히 굳건함을 반증한다. 마치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종용하듯 제각기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는 동양화과와 서양화과처럼, 경계는 사고의 내밀한 영역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신체와 행위를 재단한다. 이같은 경계 사이의 갈등과 균형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해온 기민정의 개인전이 송은아트큐브에서 열렸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대체로 화선지의 거친 물성을 강조하며 상반된 질감과 색감을 자유분방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후경의 미묘하게 변화되는 색조가 전경의 명료하고 거친 선과 대조되며 율동감을 강조한다. 우연의 산물인 것처럼 보였던 선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교한 배치였다는 것이 드러나며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액자 없이 벽에 붙거나 천장에 매달린 작품들은 날아가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존재감으로 인상의 순간성을 드러낸다.
작가가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흔적은 화선지라는 매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분홍비 아래 누워>에서 콜라쥬로 표현된 기암괴석과 안개에 덮인 것 같은 후경의 봉우리는 우리가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보던 친숙한 모티프들이다. 이 작품은 혼란스러운 추상 속에서 은연 중에 재현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다른 출품작들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특성을 보여주는데, 마치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지각적 인식의 유희를 유발하려는 것 같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훈련의 흔적들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탈피하여 더 넓은 가능성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는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가장 큰 작품인 <아름답게 캄캄해진 밤 속에서>도 추상과 구상 사이에서 해체된 풍경을 묘사했다. 청과 흑, 위와 아래, 점과 선으로 흩뿌려진 내면적인 산수화에서 범신론적 세계관이 느껴진다. 경계 밖으로 탈주하려는 파형이 서로 다른 공간을 유영하다가 이내 한계에 부딪혀 속절없이 침전한다. 흰 벽은 여백이 되어, 그리고 액자가 되어 좌절된 탈주를 묵묵히 품어주고 위로한다.



아름답게 캄캄해진 밤 속에서- 이 작품 재밌네요. 직접 봐야할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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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지의 톡톡한 질감이 중심이 되는 작업들이라.. 직접 보는게 좋을 거예요. 20점 정도의 작은 전시긴 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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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작명 센스가 좋네요! 그저 이렇게~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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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이 다들 무언가 이야기를 하듯, 그리고 서로 이어지듯, 하지만 결국 이어지지는 않는 형태로 구성되었죠.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 속에서 해석자 나름대로의 내러티브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의도인지도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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