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욱, 오세린, 오화진 – Tricksters 展 (신한갤러리 역삼)

‘경계 허물기’는 현대 미술의 사명이다. 다다(dadaim)를 필두로 20세기의 미술 운동은 주류 권력에 대한 저항을 당연시 했고, 일종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경계와 권력에 명시적으로 도전했다. 모더니즘의 선명한 인식적 경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분투를 거쳐 점차 흐려졌지만, 이제는 되려 탈구조주의와 해체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하려는 조짐마저 감돈다.

신한갤러리에서 열린 「트릭스터스 展(‘18.6.25.~7.28.)」은 제목 자체가 이미 ‘경계 허물기’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크게 보면, 최근 미술계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작품과 전시 들이 직간접적으로 이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이 지점에서 이번 기획의 명과 암이 드러난다. 많은 우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그 내부에 치열한 암투의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진정 남다른 안목과 실천을 통해 효과적으로 경계에 도전하지 못한다면 제목이 아깝다는 평가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가능한데, 누군가는 너무 노골적으로, 다른 누군가는 너무 불친절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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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번 전시에서는 설치, 공예, 멀티미디어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매체를 통해 세 작가가 고민한 흔적들이 담겼다. 오화진은 <개인의 문화 #세상을 디자인하다 – ‘조물조물조물주'(2018)> 연작 다섯 점을 내어 놓았다. 섬유미술을 전공한 작가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놓인 존재를 구현하였는데, 파란색 모직으로 꽁꽁 싸매진 신체는 전시장 여기저기에 분절적으로 흩뿌려져 있다. 실재계의 생명체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생경한 파란색이 존재의 괴기스러움을 다소 억누르지만, 어떤 형상에서도 인간, 특히 얼굴을 찾으려고 하는 관람자의 시지각적 본능은 위태로운 궁지에 몰린다. 이 괴물은 가녀린 손을 뻗어 구원(조립)을 희구하는 것 같지만 그 바람은 좀처럼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다.

분절된 신체 중에서 <조물조물조물주(뇌)>는 다소 이례적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유방의 나열인데, 제목으로는 그것이 뇌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유방은 그것이 ‘유방’이라는 동일한 기표로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모두가 완전히 다른 개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이름, 균질성, 분류 체계의 신화에 동시다발적으로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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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문화 #세상을 디자인하다 – ‘조물조물조물주(본체)'(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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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문화 #세상을 디자인하다 – ‘조물조물조물주(뇌)'(2018)

서현욱은 러시아 구성주의를 연상케 하는 두 개의 금속 조형물을 전시하였다. 그 중에서 큰 녀석인 <현생의 종말(2018)>은 금속성과 기하학적인 선을 강조하는 기념비적 설치물인데, 웅웅거리는 소음을 일으키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관람객이 버튼을 누르면 소음은 일시적으로 정지하지만, 이내 소음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존재의 무기력함만 증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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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의 종말(2018)

오세린은 베트남에 있는 한 공장에서 주문제작한 일련의 공예 작품들과 그 제작 과정 전반을 한데 묶어 작품화하였다. <베트남 프로젝트(2018)>로 통칭될 수 있는 이 프로젝트의 최종적인 산물은 예술 작품과 악세서리의 경계에 놓여 있는 오브제들이다. 어떤 것은 당장에라도 착용이 가능할 것 같지만, 보다 가치 있어 보이는 몇몇 작품들은 그 정확한 용도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보다 순수한 조형성의 영역에 놓여져 있는 것 같다. 가격표, 제품 라벨, 인증서, 쇼케이스, 그리고 조명은 명백한 상업성의 산물이며, 전시장을 매장으로 전유하려는 시도이다. 주문(기획)과 생산, 작품과 상품, 전시장과 매장, 작가와 판매자 등 다양한 지점에서 양립의 문제를 건드린다.

공예 작품들보다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재생되고 있는 다큐멘터리(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서 더 직설적인 사유의 실마리들이 포착된다. 영상은 작가의 디자인을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는 거친 현장을 담아낸다.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철저히 정치적인 이 영상이 보여주는 대부분의 작업은 사람의 손 끝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더러운 손들은 육중하고 무자비한 기계들 사이에서 무감각하게 움직인다. 금방이라도 기계 사이에 끼여서 피를 분출하거나 화학 물질이 부어져 녹아내릴 것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그 손이 붙어있는 실존적인 한 인간의 얼굴은 영상 속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그래서 그 손은 한 사람의 인격체에 귀속된 것이라기 보다는 공장 속 차가운 기계들과 등가로 교환된 것 같다. 아마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이 그런 기계화된 손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될 것이다. 대량 생산 시스템에 대한 이같은 비판적 사유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이후로 계속 제기되어 온 것임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제품(작품) 이면의 이야기들을 그만큼 애써 묵살해왔다는 뜻일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언젠가는 그 기계화된 손 마저도 제작 현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예술가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게 될까. 누군가는 벌써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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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프로젝트(2018)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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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프로젝트(2018)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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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프로젝트(2018)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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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날기 위해 머리를 없앤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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