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John Berger)는 케네스 클라크(Sir. Kenneth Clark)와 마찬가지로 BBC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사 담론을 대중화시켰다. 하지만 클라크가 예술과 문명의 관계에 관한 아카데미즘을 대중의 눈 높이로 매끈하게 고쳐 놓았던 것과 달리, 존 버거는 아예 미술을 이해하는 틀 자체를 전면 수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 비장한 선언서가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1972)」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이 위대한 선언문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이며, 얼핏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시지각 심리학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정치, 경제, 권력의 담론이 부가될 때, 우리가 잊고 있던, 혹은 애써 묵살하고 있던 불편한 입장들이 표면화된다. 존 버거는 그러한 담론의 중심에서 독자들이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적극적 해석자’로 개입하기를 소망한다. 아니, 위대한 선배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원했던대로, 우리 모두가 시각 문화를 전복하는 혁명적 주체가 되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책은 소제목 없는 7개의 장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3개의 장은 글 없이 도판만 나열되었다. 이 도판들은 주장을 담은 4개의 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저자는 애써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며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책의 구성 자체가 친숙한 틀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요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첫 장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게서 아이디어를 빌어온 이미지의 복제와 해석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이미지는 지식과 의도의 결과물이다. 가치중립적인 것을 가장하는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아카데미 전통에 입각한 이미지 해석은 부당한 신비화를 낳고, 그러한 신비화가 응집된 결과물이 오늘날의 미술사학이다. 이러한 주류 미술계의 권력은 위계질서를 정당화한다. 이제,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는 복제된 이미지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용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두번째 장은 젠더의 문제를 다룬다. 전통적으로 남자는 자신이 타자에 행하는 영향력으로 평가 받았다. 반면, 여자는 타자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로 평가되었다. 서구 미술 전통은 그러한 부당한 젠더 관계의 반영이며,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해왔다. ‘보는 남자’와 ‘보여지는 여자’는 변치않은 성적 욕망과 소유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관계는 이미지로 재생산되며 다시 개별 주체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매체가 변했어도 이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세번째로는 유화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유화가 도입되기 시작한 15세기부터 인상주의에 의해 그 본질이 파괴된 19세기까지, 유화는 주문자(소유자)의 재산을 나열해 과시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정물화, 풍경화, 자화상 등 주제가 달라져도 그 역할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실제의 감각은 거기 그려진 대상과 그 그림 자체를 하나의 고귀한 사유재산으로 포장해낸다. 이 사유재산의 현존감이 유화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애써 감추기 위해 신화를 덧입고 고귀한 성역으로 포장시켜온 것이다. 가끔 그 본질을 거부한 대가들이 있지만, 미술사가는 그 대가의 표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사상적 도전은 애써 묵살한다. 그래서 표현의 계승자는 있지만 사상적 대는 끊긴다. 램브란트의 노년기 자화상은 유화의 부당한 기능을 떨쳐버리고, 자신만의 정신을 회복한 대가의 당찬 선언이자 증거이다.
끝으로, 네번째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광고에 대한 것이다. 광고는 오지 않을 미래를 보여주며, 소비를 통해 존중받는 자가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이야기한다. 유화가 사유재산을 전시한 것처럼, 광고는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신기루를 전시한다. 광고는 선망의 판타지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며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로 번역된 것은 존 버거의 입장에 역자(출판사)가 과도하게 개입한 결과로 보인다. 역자는 저자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 합리화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제목 자체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라고 명시(명령)해버리면, 이미 이 책은 이데올로기적 선언이 되어버린다. 버거는 미술비평사를 통털어서도 매우 직설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그저 ‘보는 방식들’이라는 제목으로 한 걸음 물러난 것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그가 우리에게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라고 종용한 것은 첫장뿐이며, 그마저도 분명하지는 않다. 나머지 장들은 그저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고 있다. 우리는 그의 관점을 읽으며 대체로 동조하지만, 때로는 나 혼자 힘으로 이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한다. 심지어 가끔은 그가 이 체제를 너무나 억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연민을 품기도 한다.
사유재산을 전시하는 유화의 본질, 그리고 신기루만을 끝없이 생산하는 광고의 역할 속에서 우리가 품는 무력감을 어떤 실질적인 행동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그저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숨겨진 권력의 의도를 애써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독자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하거나 유능하지 않기에, 존 버거처럼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 지으며 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생과 업이 있다.
저항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 이 세 가지 선택지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고 믿는 사람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멍청할 가능성이 높다. 부당하게도 우리는 애초에 원한적이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어쨌든 태어난 이상, 우리 모두에게는 행복해질 권리와 의무가 있다.
세상을 계도하고 변화시켜 더 높은 사회적/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말릴 생각은 없다. 그들의 헌신이 인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은 지키고 싶기에, 결국 그들에게 이렇게 조언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이미지에는 하나 이상의 즐길 이유와, 동시에 하나 이상의 비판할 이유가 있다.
과거에 대한 문화적 신비화는 이중의 손실을 가져온다.
너무나 명백한 것을 쓸데없는 엉뚱한 설명으로 핵심을 흐려 놓는 데서 신비화는 비롯된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여기 바닐라 딜라이트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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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할리스가 대체로 괜찮은 편인데… 콜드브루는 별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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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프레스도 댓글달리면 바로 알람가나봐요~ 다른 글 보면서 놀다가(?) 첫페이지로 돌아오니 댓글이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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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 기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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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최근에 갔던 커피빈도 콜드브루라떼가 매우 별로였어요 ㅠ 커피빈이 그런건지 그 지점이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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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는 스타벅스 리져브가 맛있다는 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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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저브는 이번주 안으로 다녀올 수 있을 것같아요. ㅋㅋㅋ 고종의 아침은 진짜 예당갈 때 아니면 가기 어려울 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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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블로그인가봐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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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으로 커피 정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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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카테고리의 개설을 제안합니다. #도전파워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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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야는 잘 알지 못하므로 불가능합니다. ㅋ 좀 특색있는 곳을 갔다면, 번외편으로 본문 귀퉁이에 언급은 가능하겠지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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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별책부록 #특색있는까페를찾아서 #까페핫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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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집에 있어서 읽은 후에 댓글을 달고 싶은데, 여건상 바로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궁금한 점에 대해서 질문을 할게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저항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 > 이 세가지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판단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외의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데올로기를 이 글에서 어떤 개념으로 사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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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저항, 순응, 회피의 대상은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권력’에 가깝습니다. 특정한 주체가 지배적 위치를 점하거나 더욱 공고히하려는 목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마치 거스를 수 없는 보편적 진리인 것 처럼 포장한 상태, 혹은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을 권력이라 할 수 있을텐데, 사실상 권력을 정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이것은 명시적 의도에 의해 생겨난 것일 수도 있고, 암묵적 동의에 의해 형성된 것일 수도 있는, 일종의 공기처럼 삶 전반을 애워싸는 것이거든요. 쉽게 말하면, 푸코가 이야기하는 권력이죠.
버거의 글이 ‘이데올로기적 선언’으로 읽히는 것은 위험하다는 제 주장은, 이데올리기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제시되었습니다. ‘OO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대체로 대중을 그 이데올로기 안에 통섭하면서 동조하도록 강요하려는 의도 속에서 이루어지거든요. 저는 버거가 이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통해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그의 관점으로 계도해 나가고 싶어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전반을 놓고 보면, 대중이 새로운 예술 언어와 매체를 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학적 혁명과 인본주의를 이룰 수 있기 바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저서만을 국한해 놓고 보면, 그저 대중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단계에서 만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저서가 이데올로기적 선언서로 해석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몇몇 데리다 학자들이 ‘해체’를 ‘해체주의’로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까닭도 이러한 발상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해체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기본적인 관점이었다는 것이죠. 데리다도, 버거도 없는 현 시점에서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남겨 놓은 저서들을 뒤적거리면서 최대한 근사한 답을 찾는 것 외에는 말이죠. 그럼에도 해석의 문제는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그것은 영원한 숙제이자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저자의 죽음, 독자의 탄생이 현 시대의 숙명이라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해석이 새로운 소우주를 창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축복처럼 여기며 무수한 텍스트들의 잔해 속에 나만의 벽돌 하나를 쌓아 올릴 권리를 누릴 수 있는거죠.
저항, 순응, 회피 만이 우리에게 놓여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말은 제4의 대안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절충적 대안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신념을 동시에 추구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늘상 마주치게 되는 ‘택1’의 강박은 또 다른 권력의 작용, 즉 압제의 결과라고 봅니다. 책임성이 결여된 순전한 미의 추구와 사회적 책임감 및 도덕성의 구현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양립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양립을 추구하는 자들을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타자에 대한 비난을 통해 자신의 결핍이나 무능력을 감추거나 애써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신념, 가치관, 그리고 실제적인 행위들은 절대로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로 환원되지 않으며, 디드로의 백과전서처럼 카테고리화되지 않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계몽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거나, 미디어/교과서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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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거 ㅜㅜ 햄버거 먹고싶다 … 수제버거 양파 많이 넣은 거 토마토랑 피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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