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낙서展: OBEY THE MOVEMENT (청담 K현대미술관)

미술 장르로서 ‘낙서’는 필연적으로 스프레이, 저항, 슬럼, 바스키야(Gerard Basquiat), 키스 해링(Keith Haring) 등의 단어를 동반한다. 청담 K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위대한 낙서’들은 이러한 선입견에 대한 반론이다. 스탠실과 실크스크린으로 정교하게 찍어낸 총천연색 이미지들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팝아트 전통에 훨씬 가깝다. 거대한 판넬에 자유롭게 흩뿌려진 래커와 페인트는 1960년대의 여느 미술학교 복도에서 흔히 만날 수 있을 법한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아류들과 다르지 않다. 바스키야가 워홀을 만나 주류미술계의 일원이 되었듯, 이제 길거리 예술은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말쑥한 정장을 차려 입은채 성스러운 갤러리 한복판으로 진입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무너져가는 건물이나 담벼락, 지하철 객차 등과 같은 ‘장소 특정성’을 극복해야 하고, 캔버스와 액자의 도움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전복과 쾌락의 말초적 이미지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되고 더 폭넓은 사회적 메시지와 공감대를 담아내야 한다. 오늘날 낙서는 그렇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번 <위대한 낙서展: OBEY THE MOVEMENT>는 바로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시장을 나설 때 ‘이게 무슨 낙서전이야. 그냥 팝아트전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텐데, 그도 그럴 것이 동시대 미술에서 이들의 간격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여러 작가들이 등장했지만, 제우스(ZEVS)만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랑스의 스트리트 아티스트인 제우스는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작가였다. 그는 1990년대에 파리에서 활동하며 선도적인 그래피티를 보여주었고, ‘흘러내림(liquidation)’ 기법을 고안해냈다. 이 기법은 익숙한 형태가 끈적하게 흘러내림으로써 전혀 새로운 물성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2011년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그의 흘러내리는 회화들이 전면에 나섰는데, 그 대상은 코카콜라, 루이뷔통, 모건 스탠리 등과 같이 저명한 브랜드들이었다. 동시대 자본주의의 괴물들에 대한 그의 성찰은 이내 생태계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어갔다. 2016년의 「The Big Oil Splash 展」에서 제우스는 호크니의 <Bigger Splash(1967)>를 차용한 일련의 작품을 선보였다. 토탈 사(Total S.A.)의 기름 유출사고에서 영감을 받은 이 연작은 세계적인 정유 회사들의 막대한 영향력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윤리성 간의 간격에 대한 고발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인용한 이 정보들은 사실상 미학적 가치가 전혀 없다. 대신에 눈 앞에서 <The Big Oil Splash> 연작들을 보게 되면, 강박적일 정도로 단정한 세계와 번져가는 기름의 끈적한 물성이 대조되면서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보다 큰 화면과 명징한 색감이 시선을 잡아 끌고, 정유사 로고에서부터 흘러나온 기름띠가 내밀한 공간을 서서히 잠식해나가는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A Bigger Splash 1967 by David Hockney born 1937
David Hockney, A Bigger Splash(1967), ⓒ 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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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VS, The Bigger Splash 연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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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함과 뒤섞임의 대조는 모네의 수련을 재해석한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수련은 기하학적 별문양으로, 연꽃잎은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 같은 평면으로, 지베르니 호수는 마블링 뒤덮힌 우주 공간으로, 금빛 찬란한 액자는 아카데미즘의 명복을 비는 듯한 검은 액자로 각각 치환되었다. 제우스는 모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모티브는 물론, 서명까지 그대로 가져왔지만 자신만의 경직된 조형성을 더 전면에 부각시킨다. 이를 통해 견고한 작가성의 신화에 도전하면서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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