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범강의 「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2018)」

◐ 알 림 ◑

본 서평의 저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 출신으로, 확고한 국가관 및 안보관이 검증되었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 체제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적극 지지합니다.

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근현대 미술사 논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배제할 수는 없다. 19세기말의 데카당과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서구)의 타락을 목도한 예술가들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그것에 대응하였는데, 첫째는 견고한 이성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안적 사회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다다(dadaism)와 초현실주의로 구체화되었다면, 후자를 대표하는 흐름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4년 제1회 소비에트 작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된 방법론으로, 예술을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시킨 최초의 공식적 정치선언이었다. 이 입장에 따르면 그간 부르주아의 향락적 가치에 충실했던 예술은 인류의 타락과 지배관계의 고착화를 부추긴 실패한 전략이었으므로, 노동자 계급의 생활상을 반영한 사회적 당파성의 예술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 태동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던 아방가르드를 소탕하는데 성공하였고, 중국, 서독, 쿠바 등 사회주의를 따르던 여러 국가의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체로 미술사조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막을 내린 것으로 본다. 실제로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 후, 그 이념을 따르던 많은 국가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뒤늦게 개혁개방의 물결에 합류해야 했으며, 한때 거리와 관청을 당당하게 장식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걸작들은 국립박물관 수장고로 조용히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미술사/미학 텍스트 속에서 이들 작품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오로지 ‘반면교사’ 뿐이다. 즉,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충성한 예술의 비참한 말로를 일깨워주는 굴욕적인 패배자의 역할만이 허용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끝나지 않았다. 단순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아니라 매우 왕성하고, 어떤 면에서는 탁월하기까지 하다. 다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논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알고 있음에도 애써 묵살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주장이 문범강의 「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가 다루고 있는 중심주제이다.

나. 저자

저자 문범강의 특이한 이력은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서강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으나, 미술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학사부터 다시 시작했다. 석사까지 마치고 8년 간의 유학생활 끝에 조지타운대학교 미술과 정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상당히 입지전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미국시민권자가 된 그는 2011년부터 평양미술에 매료되어 최근까지 아홉 차례 평양을 방문하며 북한 외부인으로서는 이 분야에 대하여 가장 밀도 있는 연구를 진행한 학자가 되었다. 자신의 작품활동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북한미술 관련 전시기획, 저술, 강연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책은 그의 7년 간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결과이다.

‘연구성과’라는 언급에서 이 책이 미술사적 연구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 책은 비평서에 가깝다. 그것도 그냥 평론 수준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편향된 아름다움’의 극한까지 도달한다. 이렇게 주관적이면서 본격적인 비평서는 근래에 아주 보기 드문 것이고, 유례를 찾으려면 거의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학술적 가면에 숨은 기성 미술사가를 조롱하며 노골적으로 예술가적/비평가적 자의식을 당당히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정체성은 초반 20페이지 이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나는 ‘필자’라는 어정쩡한 말을 거부한다. ‘나’라고 칭한 것은 당당하게 이 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확고함의 표현이다. 또한 예술가의 도도함을 감추고 싶지 않기에 이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한다. 서러운 예술가는 최소한의 도도함이라도 있어야 세상과 맞대할 수 있다. – 9p

많은 전문가의 얼버무리는 식의 표현을 나는 단연코 거절한다. 나의 의견에 당당하고 싶다. 그리고 보험 들지 않은 나의 단언을 몽땅 책임질 것이다. 나의 겁 없는 판정은 뛰어난 수백 점의 조선화를 직접 관찰하고 내린 결과다. 또한 한국과 중국의 동양 인물화를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오랫동안 삭힌 미감으로 서슴없이 내린 판결이기도 하다. – 19p

결국 저자는 외부자, 경계인, 화가, 교수, 여행자, 강연자, 전시기획자, 평론가라는 복잡한 정체성을 연구의 동인이자 무기로 삼고, 거침없이 태평양을 넘나들며, 미술사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블루오션을 캐내고 있는 것이다.

다. 주요 내용 및 주장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북한미술 전체가 아닌 ‘조선화’이다. 조선화는 우리가 ‘한국화’를 일컫듯, 북한판 동양화이다. 기본적으로 다른 동양화와 마찬가지로 닥종이에 수묵으로 칠하는 기법이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조선화만의 고유한 특징은 극치까지 도달한 사실성이다. 중도수정이 불가능한 동양화 채색의 기법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유화를 능가하는 정교함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특징은 폐쇄적인 체제 속에서 외부의 영향이 단절된 채, 스스로의 미감에 천착을 거듭하면서 형성되었다. 70년 이상 단절된 특수한 환경 속에서 응집된 고유의 미감에 기예의 발전이 더해지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동양화적 사실주의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러시아나 중국의 미술이 조선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일반화된 주장에 대해 합리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과감히 배격한다. 조선화의 어머니는 조선화뿐이라는 것이다.

조선화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 책은 시대별로 조선화의 발전 과정을 조망한다. 1950~60년대에는 근원 김용준, 청계 정종여, 일관 리석호 등 조선화의 개화기를 이끈 거장들의 정감어린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 작품은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여 정치적 색채가 덜한 편이고, 전통과의 연장선상에서 논의할 부분이 더 많다. 특히 저자는 리석호의 추상성에 극찬을 보내며 그가 치바이스(제백석)를 뛰어넘었음은 물론, ‘동양화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본다.

1970년대는 ‘주제화’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주제화는 혁명, 전투, 사회주의 사상의 고취, 바람직한 인민상, 미화된 일상 등 인물이 중심이 되어 온갖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외부에서 선전화로 간주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표작으로는 정영만의 <강선의 저녁노을(1973)>, 황병호의 <기통수(1970)>, 박룡삼의 <부탁을 남기고(1977)> 등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주제화 속에 등장하는 신파가 낭만주의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간주하면서 ‘주제화=선전화’라는 획일적인 공식을 통해 작품성 전반을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되고, 온전한 창작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북한 예술가들의 특수한 입장을 고려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책의 여러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1980년대는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만한 조선화가 다수 제작된 시점으로 본다. 특히 김성민의 <지난날의 용해공(1980)>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인물 동양화의 세계를 평정해 버렸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최창호는 “먹과 채색을 닥나무 종이 위에 그리는 동양권 작가 중에서 프로이드에 버금가는 필력을 지닌 작가”라며 극찬하였다.

시대별 조망에 이어 조선화만의 특징 중 하나인 ‘집체화’를 논한다. 집체화는 다수가 협업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실상 동시대 미술에서 집체화라는 경향을 찾아보기 힘든데, 작가의 개성과 자유가 작품성의 본질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루벤스의 화실과 같은 주문 제작 시스템 상의 분업과도 비교될 수 없는데, 집체화는 특정 개인의 예술의도 보다는 공동체 전체의 목표가 우선시되어 작가 개개인이 익명성에 숨은 상태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청천강의 기적(2014)>, <피눈물의 해 1994년(1996)> 연작, <천년을 책임지고 만년을 보증하자!(2011)> 등 집체작 도판들은 복사된 이미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정교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는데, 동양화의 특성상 덧칠을 할 수 없고, 흰색은 치밀하게 계산된 여백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경이로울 따름이다.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을 하나로 규합시키고, 결코 불가능 할 것 같은 작품을 기어이 만들어내고 마는 저 육체와 정신의 지배에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끝으로 저자는 조선화와 한국화를 비교하며 논의를 마친다. 한국화는 현대적 기법을 수용하면서 극사실주의와 추상화로 분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정작 사실주의는 외면받는 경향이 컸다. 반면, 조선화는 몰골 기법의 다양한 인물화를 실험하면서 원숙한 감정 표현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대신 인물 표정을 통한 내면 표현에 집착하면서 개성적 인물상을 구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쟁취와 상실의 양면성이 한국화와 조선화에 드리워져 있다. 저자는 한국의 연구자들이 지금이라도 조선화 연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선화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동시대 미술에 접목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하여 미술 분야의 긴밀한 교류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며, 통일 한반도의 새로운 미술을 미리미리 준비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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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민 – 지난날의 용해공들(1980) / 2. 리석호 – 물바람(1964) / 3. 최창호,김남훈,박억철,홍명철,김혁철,박남철 – 청천강의 기적(2014) / 4. 집체화 작업 모습(청천강의 기적) / ⓒ 저자 및 서울셀렉션(공식 홍보용 이미지)

라. 책을 덮으며

동시대 미술의 갤러리를 거닐면서 가장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은 ‘개념’에 대한 맹신과 집착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추론에 추론을 거듭케하는 작가와 관객 간의 숨바꼭질은 지적유희의 수준을 넘어 지적공해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내 발로 걸어 들어 간 미술관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소외감은 최첨단 예술의 정점에 있는 미술평론가나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억지로 끌려 나온 고등학생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마찬가지이리라. 왜들 그렇게 개념에 집착하는 것일까? 혹여 실력이 없어서 개념으로 도피/무장하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생각 없이 즐기고 싶다. 감각을 통해 보여지는 모든 것들을 사유(思惟) 없이 사유(私有)하고 싶다. 가정, 학교, 직장에서 끊임 없이 배워 온 것을 예술가들에게 또 다시 배우고 싶지 않다. 그저 그들의 기예를 즐기고 싶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극치의 기예에 경탄하고 싶다. 넋 놓고 침 흘리면서 박수 치고 싶다. 입시학원에서부터 수 천, 수 억 원을 투자해 갈고 닦아 온 그 기예는 도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주말에 <통일전망대(MBC)>와 <남북의 창(KBS1)>을 보는 것이 낙이었던 때가 있었다. 사실 북한 관련 시사프로그램에 시선이 머무는 까닭은 북한을 제대로 알고 통일시대를 대비하자는 대의가 아니다. 호기심과 관음증이 앞선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거기에 비열한 안도감이 더해진다. ‘아, 그래도 나는 여기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이들 프로그램의 백미는 역시 말미에 크래딧과 함께 등장하는 북한 공연단이다. 악기 신동, 합창단, 서커스단, 그룹사운드, 사물놀이팀, 집단체조 등 작위적인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영혼 없이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는 공연단의 모습은 묘한 울림을 준다. 저들을 저 정도의 기량으로 이끈 동인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인가? 정신의 지배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숙련인가? 혹독한 강압의 결과인가? 외부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기예에 경이를 표할 뿐이다.

북한미술에 대한 나의 입장도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들의 완벽한 기예를 그저 즐기고 싶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주체사상의 선전, 우리민족끼리, 백두혈통에 대한 충성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지성인인 내가 현혹될리도 만무하다. 그저 이 세상 어느 민족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조선화의 독보적인 섬세함, 완벽한 먹의 통제, 절제된 감정 표현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기예만 놓고 보면, 조선화는 미술사에서 그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새롭고도 아름다운 고지를 견고히 밟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들고 다니는 3일 동안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시선 속에서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푸코의 권력 이론은 타당했다. 나는 사회구조의 케케묵은 담론에 젖어 나 자신을 검열할 수 밖에 없었다. 사르트르의 시선 이론도 정확했다. 나는 스스로 객체가 되어 버렸고 표지를 애써 숨겼다.

저자 문범강은 대체로 표현과 기교 측면에서 조선화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 조선화를 체제 선전화, 혹은 키치로 평가절하하는 외부의 시선에 대응하여 북한 체제의 사정과 예술가들이 처한 입장에 대하여 고려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체제에 대한 증오, 트라우마, 두려움이 뒤섞여 미적 가치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우리가 새겨들을만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조선화를 연구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어 놓는데 있어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우리들이지만, 정작 우리는 이념의 사슬에 여전히 함몰되어 애써 눈을 가릴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입장에 놓여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비평가가 되어야 하고, 모든 비평가는 ‘편향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나의 예술관에 명확히 부합하는 책이다. 또한 유미주의자로서의 태도도 공감이 간다. 북한미술에 대한 연구서적이면서도 미학적 비평의 칼날이 살아 있다. 어려운 말을 잔뜩 동원하고, 중언부언하면서,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미지근한 평론들에 지친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만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굳게 닫힌 우리의 미감과 포용력을 조금이나마 열어 젖혀 줄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이번 한 번으로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고로, 저자가 본문에서 수 없이 예고한 “다음 저서”를 기다려보기로 하자.

문범강의 「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2018)」”에 대한 답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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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으….그림이 엄청 꼼꼼한데 예쁘진 않아요 ㅠㅠㅠㅠ 저자분 굉장하네요. 미국 학부 유학은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가던 길을 트는 것이 쉽진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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