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손튼의 「걸작의 뒷모습(Seven Days in the Art World)」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누구에게나 동경하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 세계는 바라만 봐도 가슴이 떨리고, 나 자신이 일원이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이는 그런 곳이다. 내게 첫번째 동경의 무대는 뮤지컬이었고, 이어서 패션 비즈니스가, 지금은 미술계가 그런 곳이다.

첫번째 동경의 무대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글도 열심히 쓰고, 영세 기획사의 서포터즈 활동도 했었다. 최근까지도 뮤지컬 동호회에서 노래를 불렀었다. 하지만 업(業)으로 삼기에는 일단 발을 들여 놓을 공간 자체가 그곳에 거의 없었고, 더 엄밀히는 안락한 삶에 대한 열망이 내 안의 동경을 압제했다.

두번째 동경의 무대에는 성공적으로 안착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1.5년만에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도 문제였지만, 내가 가진 역량이 성과로 전환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점이 뼈 아팠다.

세번째 동경의 무대는 아주 활발한 ‘현재진행형’이다. 아마추어 미술사 연구회를 만들자마자 성공적으로 본 궤도에 진입시켰고, 1.5년이 지난 지금은 60여명의 활성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미술관을 부지런히 찾아 다니고, 미술책과 다큐멘터리를 병적으로 탐닉하며, 무엇보다도 미술에 대해서 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언젠가 내게 큰 자산으로 쌓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걸작의 뒷모습」이라는 책에 대해서 쓰는 것도 그러한 동경 어린 활동의 일환일진데, 그동안 이 공간에서 거의 꺼낸적이 없었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야만 하는 까닭은, 이 책이 나에게 소구하는 지점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동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민족지학적 참여관찰법에 근거한 이 보고서는 미술계, 정확히는 ‘현대미술계’의 민낯을 철저히 노출시키는 관음증적 산물이며, 이 책에 매력을 느낄 독자는 필경 미술계 전반에 걸쳐 동경을 품고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랬듯.

저자 세라 손튼(Sarah Thornton)은 4년 간의 취재와 250명이 넘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399쪽 짜리 판도라의 상자를 만들었다. 상자를 열어재낀 판도라와 인류에게는 재앙이 닥쳐왔지만, 이 책을 펼친 이들에게는 동시대 미술계에 대한 다층적인 이해가 찾아올 것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여 7일 동안 숨가쁘게 달려가는 저자의 눈 앞에 뉴욕 크리스티 옥션, LA 칼아츠 강의실, 바젤 아트페어, 테이트 미술관의 터너 상 시상식, 뉴욕 아트포럼 매거진 사무실, 무라카미 다카시 스튜디오, 베네치아 비엔날레 현장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크리스티 현장에서는 미술사에서 떠받들던 작품의 정신성은 온데간데 없고,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된다. 컬랙터의 소유욕은 10대 후반의 성욕을 상기시키고, 작가는 이를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이제 옥션을 전면부정하는 것은 미술계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LA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의 비평수업 강의실에서는 ‘손기술’을 아예 놓아 버린 개념주의 미술계의 새싹들을 본다. 10시간을 훌쩍 넘기는 마라톤 수업 풍경 속에서 왜 동시대 미술이 그토록 현란한 개념의 전쟁을 벌이는지 수긍하게 된다. 바젤 아트페어에서는 딜러와 컬랙터의 숨막히는 격돌을, 터너 상 시상식에서는 예술을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사유의 실마리들을 발견한다. <아트포럼> 매거진의 사무실에서는 날밤을 새며 비평가와 미술계에 다리를 놓는 은밀한 손들을 본다. 이어서, 일본은 물론 뉴욕에까지 진출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스튜디오는 정말 인상적이다. 동시대 미술계의 아이콘이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조금은 짐작 가능하다. 변화무쌍한 창조력에 피를 말리는 치밀함, 그리고 독특한 지역성까지 더해진 무라카미의 세계관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간 듯 했고, 그의 <오벌 붓다(Oval Buddha)> 가 주물공장에서 첫 선을 보인 순간은 나 역시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가 된 것 마냥 코끝이 찡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화려한 피날레였다. 앞선 무대에서 만난 여러 관계자들이 이 미술계의 최정점에서 조우하며 그간의 논의를 정리한다. 세계화는 미술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 적합하지 않다고. 그리고 그리 쉽게 오지 않을 거라고. 수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전시는, 비엔날레는, 그리고 담론은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우리의 인생에 훨씬 좋을 거라고.

하루 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등장하여 저자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며, 한 번 등장했던 사람이 다음 장에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다시 나타나지만, 생동감을 높여 주기 위한 이같은 친절한 장치들을 굳이 폄훼할 필요는 없다. 동경하는 세계를 현장감 있게 보여주는 세라 손튼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마땅하다.

저자가 만나서 인터뷰하는 수많은 미술계 인사들ㅡ작가, 딜러,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컬랙터, 미술사학자, 비평가, 발행인, 기타 그들을 돕는 사람들ㅡ이 전해주는 미술계의 매커니즘은 참으로 보배로운 정보(혹은 관점)이며, 그 세계를 둘러싼 복잡미묘한 이해관계와 암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작가는 고고한 천재이자 몽상가로서 기억되고 싶어하지만, 한편으로는 비싼 값으로 작품을 팔고 싶어한다. 딜러는 미술사적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싶어하면서도 컬랙터와 상담할때 발휘하는 얄팍한 상술을 작가에게 들키는 것은 극도로 두려워한다. 큐레이터는 작가를 존중하고 그의 가치를 세상 속에 전하는 것에 사명감을 가지면서도 나름대로의 주관과 취향을 시스템 위에 투영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큐레이터 간의 작품 선점 경쟁은 살벌하다. 비평가는 자신의 글에 주목하지 않는 비평지를 저주하면서도 새로 부임한 편집자가 어떤 취향의 전시에 관심을 가질지 예측해 보고자 광고지면들을 들춰본다. 모든 주체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고, 공생의 선순환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부던히 애쓰고 있다.

군데군데 숨어 있는 지혜로운 미술계 선배들의 촌철살인은 작가나 지망생뿐만 아니라 미술계 외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 가능한 인생의 진리를 함의하고 있다.

존 발데사리: 가만히 앉아서 ‘걸작을 만들 때까지는 아무것도 노출하지 않을 거야’라는 식의 자세는 절대 안됩니다. – 98~99p

존 발데사리: 예전 작품을 팔고 싶으면 새로운 작품을 만들라. – 158p

어쩌다보니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의 예문만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의 언어가 내 스타일에 맞나 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이거였다.

존 발데사리: 작가가 아트페어에 참관하는 것은 십대 자녀가 섹스에 한창인 부모님 침실에 불쑥 들어가는 것과 같다. – 156p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미술계의 민낯을 직시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의견은 최대한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촌철살인의 비유와 짧막한 비평들은 무미건조한 관찰이 주는 지루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자면, 저자가 자신을 시종 ‘필자’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역자는 저자의 중립적인 태도를 부각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한 것 같은데, 역시 아무리 봐도 ‘필자’라는 단어는 죽은 단어 같다. 그냥 ‘나’라고 해도 되었을 것을…)

레베카 워렌의 (중략) 브론즈 작품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앙상한 조각상이 잘 먹고 살이 찌더니 마리화나까지 피우고 성욕까지 왕성해진 것 같은 도발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 178p

20180805_142307

이 책은 나처럼 미술계를 동경하는 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겠지만, 그 자들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댓글을 현대미술 관련 기사에 달아 놓는 이들에게 이 책을 선물해야 한다.

“저것도 예술임? 이해 불가”, “가진 자들의 돈 지랄”, “예술이 아닌 투기”, “저런건 나도 그리겠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럼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것이다.”, “일단 똥을 싸라, 그럼 유명해질 것이다” 기타 등등…

이런 댓글을 쓰는 사람들이 거론되는 작품들의 미술사적 의미와 작가의 천재성 따위를 알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그냥 모른채 살아가도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미술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그리고 거기서 숙명적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이들의 존재는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인류의 시야를 얼마나 확장시키고 있는지, 우리의 지난한 삶에 얼마나 풍부한 사유의 단초를 던져주고 있는지, 우리의 시각성에 얼마나 생동감 있는 유희로 보답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받아 마땅한 존중을 보내주어야 한다. 그것은 미술계를 이해하는 것과 별개의 일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운명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동시대 인류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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