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목차를 훑어보니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두서 없이 짜깁기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산만하고 가벼운 책일 것 같았다. 대체로 ‘그림으로 읽는 어쩌구저쩌구’ 류의 책이 안겨줬던 실망감이 늘 그런 것이었다. 화려한 그림으로 시선을 끌고 흥미를 자아내지만, 이야기에는 깊이가 없고, 작품 해석에서도 한계를 드러내며 역사와 그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간 교육적인(≒고리타분한) 책을 많이 냈던 김영사의 행보와 참고서를 연상케하는 표지 디자인을 감안하니 이 책에 대한 기대를 더더욱 접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의외로 깊이와 재미를 모두 잡은 책이었다.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은 총 27개의 짧막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략적으로는 역사의 흐름을 따르지만, 각 장 안에서는 시대에 얽매이지 않고 해당 주제를 폭넓게 아우른다. 주제는 앞뒤로 느슨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앞 장에서 던져진 작은 화두를 뒷 장에서 더 깊게 파고드는 형국이다. 개화기, 일제강점기, 6.25전쟁, 미군정을 연이어 거치며 세계사에서도 유례 없이 압축적으로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담았다.
특히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서양 화가들의 정감어린, 혹은 제국주의적인 시선들은 늘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우리 민족의 삶을 긍정했던 외부인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동시대에 하나의 풍경을 대하는 서로 다른 관점들은 외부인의 이해가 어디까지나 이해의 수준에 머물 뿐, 완전한 동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휴버트 보스(Hubert Vos)의 <서울풍경(1989)>은 모든 것을 하나의 단일한 시점으로 아우르며 계몽적 기록으로 남기려는 서구적 시선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자연의 다채로운 형국을 한 화면에 입체적으로 담으려고 했던 당대 산수화와는 전혀 다른 미감에 기초한 것이다.
저자는 근대를 담은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민족의 아픔이나, 외세에 대한 분노와 같은 일차원적 감정의 고취에 머무르지 않고 탐사보도에 가까운 자료수집과 해석의 열의를 보여준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일본식 초등교육기관의 증가와 전통적 유교식 교육기관인 서당의 몰락을 수치적으로 대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지금은 조그마한 공원으로 전락한 밤섬을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었고, 얼마나 많은 조선소가 거기서 운영되었는지도 알게 된다. 저자 이충렬은 당대의 기사, 인터뷰, 각종 문서를 취합하여 신빙성 있게 시대를 재구성함과 동시에 역사학적 해석에도 적극 개입하면서 독자들이 시대를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한 문장이 담백하고 매끄러워서 읽기가 편하다. 그래서 이 책을 정신 없이 읽다보면, 학창시절에 말 솜씨 좋고 열정 넘치는 국사 선생님이 진도에 여유가 있을 때 샛길로 빠져서 들려 주시던 재미있는 뒷 이야기들을 다시 듣는 것 같다. 나도 학생 때 그런 이야기들을 참 재미있게 들었었는데, 그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로 끝나곤 했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였다.
잠재되어 있었던 근대에 대한 나의 관심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展>에서 다시금 촉발되었고, 그 전시가 인상적이었던 까닭에 어지간하면 사지 않던 도록까지 구입했다. 그리고 그 관심은 이 책으로 이어졌다. 여기서도 <근대의 걸작전>에 출품되었던 많은 작품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구본웅의 눈에 비친 천재 이상의 강렬한 눈빛(<친구의 초상, 1935>), 휴버트 보스가 남긴 조선의 첫 유채초상화(<민상호 초상, 1898~1899>), 그리고 당당한 신여성들… 시대를 담은 걸작들은 그 어떤 증언 보다도 우렁찬 목소리로 시대를 대변한다.
특히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한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의 그림들이 좋았다. 그녀의 그림에는 조선의 아이와 여인들을 사랑했던 진정성이 담뿍 담겨 있다. 조형적인 측면에서는 평면성, 순수한 원색의 색감, 선명한 윤곽선 등 동양화풍의 친숙함이 느껴지는데, 아마도 일본 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화풍은 일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지라도 그녀의 마음은 우리 민족, 그중에서도 낮은 자들에 가까웠었다는 것이 크리스마스실 도안의 사례에서 느껴진다. 1920~1930년대 우리나라에서 결핵은 마치 중세의 흑사병만큼이나 무서운 불치병이었다. 고맙게도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덴마크의 성공사례를 참고하여 크리스마스실 보급 등 다양한 결핵 퇴치 활동을 전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도안을 부탁했던 화가 중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 키스인데, 그녀의 크리스마스실 도안에는 우리네 아이들과 여인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40년의 크리스마스실 도안은 원래 문이 없었고, 큰 산과 남매가 화면에 꽉차 있는 형태였다. 그런대 일제는 그림 속 산이 20미터가 넘어 국방안보 규정에 어긋나며, 일본 건국연대가 아닌 서력연대를 쓰고 있어 부적절하다며 이를 금지한다. 키스는 말도 안되는 규제 논리에 분노했지만, 교묘하고 아름답게 전통양식의 문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러한 부당규제를 절묘하게 극복한다. 수정된 작품은 마치 아이들이 문을 막 빠져나와 자리를 잡은 것 같은 생동감에 ‘그림 속 그림’이라는 안정감까지 더해지면서 원래의 도안 보다 더 훌륭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훌륭한 예술가들은 이처럼 늘 시대보다 앞섰고, 그로 인해 받을 수 밖에 없는 따가운 눈총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그들의 작품이 후대까지 파괴되지 않고 전해지도록 지혜를 발휘했다. 미술사의 위대한 혁신은 이렇듯 파격과 타협의 균형 속에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키스의 크리스마스실 이야기는, 비단 한 이방인 예술가가 암울했던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 보여준 희망의 메시지에 그치지 않고, 예술 작품의 정치적 검열이라는 화두까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한다. 공공예술에 대한 우리(공직자 & 대중)의 검열은 일제의 그것에 비하여 충분히 성숙했는가?
휴버트 보스의 고종 어진(초상화)은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보스는 고종의 주문을 받아 동일한 초상화를 두 점 그렸는데, 하나는 황제에게 납품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적인 유화 초상화를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보스의 고종 어진은 큰 화제가 되었으며, 작가가 그것을 들고 궐을 빠져 나갈 때 마치 진짜 황제를 들고 나가기라도 하는 냥 충격을 받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고종 어진은 만국박람회의 주요 전시관인 미국 회화관에 걸리지 않고 ‘인종과 사회관’에 전시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민족을 향한 당대 서구 시선의 특징을 간파할 수 있으며, 만국박람회의 제국주의적 전시 전략을 읽을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현존성의 맥락에 놓여지지 않고 ‘이방인’, ‘제3세계’, ‘오리엔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국의 황제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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