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해리스의 「콘클라베(Conclave): 신의 선택을 받은 자」

거룩한 성의를 걸친 종교계의 흑막을 열어 젖히는 이야기는 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로마 가톨릭은 지난 2000년 간 박해의 상징으로, 시대의 율법으로, 구습의 망령으로, 혹은 평화의 또 다른 이름으로 적절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찬란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기에, 그 내막에 대한 궁금증도 더불어 커져간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신비를 동반하며 그 생명을 유지하기 마련이므로 그런 궁금증들은 좀처럼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티칸의 비밀 예금 규모가 어지간한 선진국의 경제규모를 능가한다던지, 교황과 추기경들의 사생아 유골이 바티칸 모처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던지 하는 괴담들도 종종 들려온다.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는 그런 가톨릭의 이면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소설 「콘클라베」는 교황이 선종한 후, 각국의 추기경들이 모여서 콘클라베를 치르는 과정을 촘촘하게 들여다본다. 콘클라베 절차는 교황령에 의해 명시되어 있고, 그것이 열릴 때 각종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절차가 공개되기는 하지만, 실제 의식 중에는 투표권자인 추기경들 외의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그래서 일반 대중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정황들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작가가 ‘성스러운’ 콘클라베 의식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추기경단 단장인 야코포 로멜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의례의 여러 국면들은 마치 우리도 그 중심에 앉아서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고뇌를 공유하는 것 같은 생동감을 안겨준다.

소설은 교황의 갑작스러운 선종으로부터 출발하여, 각 국의 추기경을 소집하고, 콘클라베를 조직하고, 결국 새로운 교황을 선발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제목 그대로 콘클라베 자체에 집중하면서도 단순한 시간적 나열에 그치지 않고 여러 음모와 술수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모든 뛰어난 소설이 그렇듯 생동감 있는 인물의 구현에 있다. 전체 의례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자, 야심을 가졌거나 혹은 그냥 지지자들에 끌려다니는 유력 후보자, 자신에게 유리한 후보자를 옹립하여 훗날을 도모하려는 선동가 등 여러 주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건을 마주할 때 마다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며 복잡다난한 ‘인간성’을 증명한다. 그리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돌발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입장이 변화하는 모습은 매우 설득력 있다.

(스포일러 절취선)


 

주인공 로멜리는 그러한 심리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관료적인 인물로, 교황의 고독과 무게를 감당할 의지가 전혀 없다. 그저 이 부담백배의 행사가 주님의 뜻대로 아무런 탈 없이 마쳐지기만 바랄 뿐이다. 하지만 유력 후보자들의 추악한 욕망과 술수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에 최소한의 개입은 불가피했고, 그 결과 자신이 되려 교황의 유력 후보자로 부상하기까지 한다. 그 지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교황이 되면 교황명을 무엇으로 할지, 첫 발코니 연설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고민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짐짓 놀란다. 이는 마치 뜻하지 않은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는데,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무대위로 올려진다면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까’라며 마음 속으로 선곡을 하고 있는 상황과도 같다. 결국 사람은 시키면 하게 되어 있고, 가끔은 자기가 하겠다며 설치는 사람 보다 ‘나는 깜냥이 안됩니다’라고 인정하는 사람을 억지로 시켰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사실 작품의 결말은 나의 기대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추기경들 개인 차원을 넘어 로마 가톨릭의 근간을 뒤흔드는 더 추악한 속내가 드러날 거라 기대했고, 그게 이 작품의 숱한 리뷰들 속 진부한 수사인 ‘충격적 반전’의 실체일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음모들이 드러날 때마다 나중에 드러날 더 큰 음모를 기대했다. 하지만 작은 음모들은 더 큰 음모의 복선이 아니었다. 더 큰 음모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이 지점에서 로버트 해리스는 신성모독의 비난으로부터 지능적으로 회피하면서, 동시에 음모론의 관음증은 적절히 환기하는 절묘한 균형을 달성한다.

(더 강한 스포일러 절취선)


 

소설 「콘클라베」의 진짜 반전은 소소한 음모가 아니라 새로 선출된 교황 그 자체에 있었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도 아니요, 전통의 수호자도 아니요, 새롭게 부상하는 진보적 상대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이슬람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인류애를 실천한 ‘의중 결정’ 추기경이었다. 선종한 교황과 본인 외에는 아무도 그 존재조차 몰랐던 험지의 수호자. 그리스도의 삶을 입으로만 떠드는 ‘삯꾼의 목자’가 아니라, 전쟁과 테러의 한 복판에서 예수의 삶을 스스로 실천했던 참 목자였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에는 심지어 그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가톨릭 2000년 역사에서 견고했던 성 차이의 권력까지 깨부수는 혁명가로서 군림하게 된다. 물론 이 사실은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지만.

이 지점에서 나름대로 현실성을 구축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멀리 간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논리적 설득력이 아닌 메시지겠지만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운 콘텐츠들이 지면과 스크린을 점령했다. 돌아온 스타워즈 시리즈의 ‘인종/성별 할당제’식 정치적 올바름은 나같은 유미주의자들에게 거부감만 불러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갖추어 반감을 일으키지 않고 화두를 던지는데 성공했다.

기독교는 진정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는가? 기독교가 살린 사람은 기독교가 죽인 사람에 비하여 많은가?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나? 교황과 콘클라베의 성서적 근거는 존재하는가? 베드로는 본인이 초대 교황으로 명명되는 것에 동의할까? 여성은 언제까지 수녀의 역할에만 국한되어 추기경들이 먹을 음식 서빙에 만족해야 하나?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답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로버트 해리스의 「콘클라베(Conclave): 신의 선택을 받은 자」”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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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기 욕심채우려고 ㅎㅎ이상하게 믿는 분들이 문제같아요 ㅎㅎ 마지막 문단에 있는 의문들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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