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피티: 거리미술의 역습 展 (우양미술관)

늘 강조하지만, 전시의 성과는 작가의 이름값이나 작품 수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과 그것의 배치가 우리에게 어떤 사유의 확장을 가져오는지, 우리 삶에 어떤 화두를 던져주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 힐튼호텔에 자리한 우양미술관의 <그래피티: 거리미술의 역습 展>은 작가의 이름값도, 작품 수도 청담 K현대미술관의 낙서展에 훨씬 못 미치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전시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알타임 죠(Artime Joe)의 총천연색 스프레이 낙서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캔버스를 탈주한 자유분방한 개체들이 신성한 화이트큐브를 농락하며 관객의 시야를 압도한다. 처음 그것을 봤을 때는 나무 판넬 같은 가벽을 세우고 작업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작품 설명판의 ‘Spray Painted on the Wall’이라는 문장은 벽 자체에 그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언했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막내 큐레이터에게 물어보니 벽에 직접 그린 것이 맞다고 한다. 전시가 끝나면 지워질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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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현대미술관의 <위대한낙서展>에서는 캔버스에 얌전히 자리 잡은 낙서가 유독 많았고, 나는 그 현상을 현대미술의 두 가지 징후로 해석했다. 첫째, 낙서가 팝아트를 닮아가면서 서로 간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과정, 둘째, 낙서가 근대적 미술관에 보낸 도전장이 서서히 받아들여져 가는 과정. 그런데 우양미술관의 <그래피티展>을 보니 그 생각이 조금은 바뀐다. 추상이든, 재현이든, 타이포그래피이든 상관 없이, 낙서는 역시 벽을 비롯한 온갖 구조물에 한계 없이 흩뿌려져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물론 그러한 낙서의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성격은 미술관 및 전시학의 뿌리깊은 제도적 입장과 대척점에 있을 수 밖에 없겠지만, 공간을 제약 없이 넘나드는 낙서의 매력은 구속을 외면할 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구태의연한 선입견일지라도, 심지어 외연의 확장을 억누르려는 구습의 목소리일지라도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 한 사람의 견고한 시각성을 변혁하는 일은 원래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닌가.

벽면을 자유분방하게 수 놓는 낙서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작품들의 메시지가 혁명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환상, 자의식, 욕망의 세계가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제바(XEVA)의 작품은 사진을 찍은 것 같은 사실성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의 작품은 낙서의 상징과도 같은 스프레이라는 매체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포토리얼리즘과의 절충점을 찾기라도 하듯 집요함으로 마감되었다. 인물의 살결을 따라 흐르는 광택은 마치 오래 전 단관극장의 포스터를 상기시킨다. 이러한 표현적 특징은 점차 추상과 캐릭터라는 양극으로 규합되어 가는 낙서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하면서 기성 예술과도 합의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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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언급한 막내 큐레이터에게 물었던 질문이 더 있었다. 벽에 직접 그려진 작품의 소유권은 전시 종료 후에 어디로 귀속되는 것인지, 그리고 작품의 댓가는 어떤 형태로 지불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에는 민감한 것처럼 포장된 사소한 진실들이 너무나 많다.

어쨋든 확실한 것은 전시가 끝나는 9월 30일이면 여기 있는 다수 작품들이 지워지거나 새로운 안료로 덮혀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알타임 죠, 제바, 켄지 차이(Kenji Chai)ㅡ 세 사람이 협업한 낙서의 미적 생태계는 마치 조금 긴 일회성의 퍼포먼스일뿐이었다는 듯 몇몇 기록만을 남긴 채 사라질 것이다. 불경스럽게도 작품의 제목들 조차 기록하지 않은 이 글은, 많은 주목을 끌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한 그 찰나의 순간을 미리 애도하는 일종의 추도사이다. 그리고 훗날에 그 순간을 상기하기 원하는 소수의 애호가를 위한 작은 묘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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