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읽는 서양미술사는 대체로 남성 후원자와 남성 화가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남성 미술사가가 요약한 결과물이다. 여기서 여성의 이름은 아주 제한적으로 등장한다. 브리짓 퀸(Bridget Quinn)의 ‘여성 예술가론’은 H. W. 잰슨(Janson)의 기념비적 「서양미술사(History of Art)」에서 단 16명의 여성만 등장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대한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책은 잰슨에서 언급된 16명 중 2명을 포함한 15명의 여성 예술가들을 다룬다. 이러한 선정은 저자의 취미를 반영하겠지만, 기존의 규범화된 미술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들을 조명하겠다는 의도도 보여준다. 이 15명 중에서 내가 알고 있던 이름은 단 3명 뿐이었다. 나름대로 3년째 미술책만 읽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충격적인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선정된 예술가들이 ‘여성 미술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들을 몰랐었다는 자책감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름을 듣기 위해서는 기존 미술책에서 벗어난, 오로지 그들만을 다룬 별도의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구조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15명의 이름은 각 장의 제목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 삶과 예술을 들여다 보지만 절대로 가치중립적인 전기는 아니다. 저자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학습배경, 성장과정, 주관적 감상, 사회적 관계 등을 연계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페미니스트로서, 미술사가로서, 작가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정체성은 이 책의 기획과 전개 과정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였음이 드러난다. 저자는 동지애와 전우애로 자신이 서술한 예술가들과 긴밀하게 결속되었다. 그러한 저자의 진정성에 의하여 이 책은 무미건조한 전기 묶음에서 벗어나 생명력을 얻었고, 우리에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많은 개입은 그만큼 많은 반대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나는 대체로 예술가들의 지난했던 삶을 묘사하는 방식과, 작품의 의미를 발견하는 논리에 동조를 보냈지만 지나친 ‘여자들끼리 만만세’ 식 서술은 거슬렸다.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성’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대체로 그것의 실재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쪽이다. 여성이 세상을 보고 표현하는 방식에서 특유의 창조력과 온건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여성으로서 응당 가질 수 있는 비평적 견해이다. 하지만 마리 드니즈 빌레르(Marie-Denise Villers)의 <샤를로트 뒤발 도녜의 초상(1801)>이 아름다운 까닭이 두 여성의 완벽한 연대감의 순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귀결은 ‘여자들끼리’의 지나친 신화화로 느껴진다. 유딧 레이스터르(Judith Leyster)의 마무리 단락에서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미술계를 상상하는 장면도 치기어린 설정 같다. 버네사 벨(Vanessa Bell)의 <스터드랜드 해변(1912)>에서 “아이들이 가득하고 여성들이 정착한” 이상향을 떠올리는 것도 억압적 프레임과 이분법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로 보인다.


이런 사소한 불만들은 내가 향유하고 있는 알량한 젠더 권력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여성을 위한 목소리가 더 온건해지기를 바라는 교묘한 술책일 수도 있다. 존경하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을 희화화한 것에 대한 반발심일 가능성은 조금 더 크다. 그런 가능성들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만이 지니는 차별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이분법과 페미니즘적 신화화에 반대한다. 남성들이 그간 부당한 권력을 누려왔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에 대한 반대와 대척을 통해 여성 예술가들의 가치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합리적인 제도를 통해 기회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여성 미술가들이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공정한 평가를 온전히 돌려주는 것이다. 이 작업은 편가르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 주변에 늘 존재했지만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여성 예술가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를 통해 알게 된 이름들로부터, 나도 시작하려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앉아서 일을 한다. 조각은 농사와 같다. 그냥 계속 꾸준히 하면 상당한 양을 해낼 수가 있다.
루스 아사와
모르는 화가들로 가득하네요! 읽어봐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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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설정이 추가되었군요. ㅋ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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