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예술과 문화(Art and Culture: Critical Essays)」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비평가 한 사람이 미술의 흐름에 미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마지막 사람이다. 그의 비평은 잠시나마 역사의 축을 옮겼고 공간을 재배치했다. 자신이 믿고 옹호하는 경향에 대하여 치밀하게 근거를 마련한 결과, 역사의 흐름 속에 기어이 자리를 잡게 했다.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기에 그의 이름을 빼고 20세기 미술론을 기록하는 것은 무리이다. 무엇보다도, 시야에서 벗어난 지점을 첨예한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모더니즘 회화’라고 일컫는 평면성과 시각 경험 위주의 혁명에서 마네, 세잔, 피카소의 뒤에 미국 화가를 위치시키는 그의 전략은 매우 자의적/작위적임에도 치밀함과 섬세함으로 면죄부를 얻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자신에게 쏟아질 편파성에 대한 비난의 가능성을 뚜렷하게 직시하면서도 다층적 경향들을 아우르는 뛰어난 통찰력을 무기로 겁없이 전진했다.

「예술과 문화」의 표면적인 논조 자체는 겸손하지만 그 제목이 이미 암시하듯 대단히 야심찬 기획이다. 가장 왕성했던 시기에 발표한 37편의 에세이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일반론에서부터 파리 및 미국의 화가들에 대한 평론, 그리고 문학 비평까지 아우른다. 이중에서 개별 화가들에 대한 평론은 대체로 재미가 없어서 꾸역꾸역 읽어넘겨야 했는데, 이는 그린버그의 글이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라 번역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뭉툭해진 ‘글 맛’, 그리고 거론된 화가들에 대한 나의 무지 탓일 것이다. 애초에 그의 작가론은 작품의 실례를 낱낱이 파해치기 보다는 일반화된 경향들을 역사학적 계보에 위치시키는 형태에 가깝다. 이러한 서술은 온전한 평가를 위해서는 개별 작품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미학과는 다소 상충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빠르게 파악하고 싶은 우리의 안일함에는 적절히 조응한다.

책에 실린 미술 일반론들은 역사적 흐름들을 잘 정리했기에 대단히 유용하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미술 권력의 전이를 가져오는 서술은 국지적인 경향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필요로 하지만, 미술계 상층부에서 벌어진 상황들만 국한해서 본다면 어느 정도 진실하다. 그런대 그린버그의 미술사 서술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은 지식 영역이 아닌 혁신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우리는 기술적 한계와 제도적 압박을 뚫고 나온 위대한 미적 발견에 대해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과대평가는 우리와 가까운 역사일수록 더욱 빈번하게 벌어진다. 하지만 실상 미술사에서 전에 없이 완벽한 변혁, 전통과의 단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나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인물에 가까울수록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데 사실 흥미를 느끼는 것은 우리뿐이다.  ㅡ 야콥 부르크하르트

로잘린드 크라우스나 도널드 프레지오시라면 이러한 ‘모더니스트스러운’ 계보학적 서술을 되풀이하려는 나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균형잡힌 시각으로 인과관계를 검토하면서 과대평가 하지 않으려는 끊임 없는 노력이다. 위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개별 작품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 노력은 빛을 발할 것이다.

에세이를 다 읽고 나면 그린버그의 취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수정과 마감으로 신선한 표현을 숨기는 것을 싫어한다. 이 취미로 모네, 루오, 스미스, 드 쿠닝, 고르키를 지적했다. 또한 발전(반례: 루오, 샤갈), 폭넓음(반례: 브라크, 에이버리), 솔직함(예: 샤갈), 독창성(예: 스틸, 뉴먼), 방향성(반례: 립시츠, 호프만)을 중요시 한다. 그는 회화가 회화로서 다른 예술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오로지 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평면성의 시각 경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작품의 내용, 사회적 맥락, 의도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문학에서 주제를 빌려오는 것은 종속적인 낡은 생각이자 일종의 열등감이므로,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린버그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확신에 찬 선동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소심한 실증주의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그리운 까닭은, 지금 우리 곁에는 그렇게 자신의 나약함을 감춘채 취미의 전선을 누비는 웅변가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술에 관해 쓰여지는 대부분의 글들은 적절히 말해 비평보다는 저널리즘에 속한다.”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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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 노트 >

아방가르드와 키치

아방가르드가 예술의 과정을 모방한다면, 키치는 예술의 결과를 모방한다. 아방가르드가 권위주의 국가에서 배척된 까닭은 그들이 비판적이어서가 아니라 키치와 달리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들에게 키치가 유용했던 것처럼, 사실상 모든 사회에서 대중을 위한 예술 담론은 선동에 불과한 것이다.

문화의 곤경

문화 쇠락에 대한 T.S.엘리엇의 반자유주의적 견해는 요점을 벗어났다. 산업화는 되돌릴 수 없다. 산업화는 노동과 여가를 분리시키며 여가를 평가절하했지만 그러한 경향은 사회주의로 간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다. 이제는 모두가 효율적인 노동의 과업을 지게된 이상, 문화의 무게중심을 노동의 한 가운데로 가져와야 한다.

콜라주

콜라주는 눈을 속이는 장치와 눈을 깨우는 장치간의 충돌을 통한 평면 속 환영의 유희이다. 환영과 재현 사이에서의 긴장이다. 장식과 조형의 융합이다.

심포지엄 기고문

추상의 시대를 맞아 미국은 프랑스를 앞질렀다. 매체의 가능성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원시 회화

원시 미술은 산업사회의 인쇄물이 준 영감에서 시작되었다. 무능력과 사실주의가 상충한다는 점이 특징이자 매력이다.

추상, 재현, 그리고 등등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이지 재현이냐 추상이냐 아니면 어떤 원칙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미래의 감식안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게 재현과 추상을 바라볼 것이다. 결국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은 형식이다.

새로운 조각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이 시작된 곳은 로댕이나 브라쿠시가 아니라 오히려 피카소의 콜라주였다. 새로운 구성-조각은 즉물성으로 3차원의 공간에서 시각적 경험을 주도한다. 하지만 이런 조각의 잠재능력은 아직 완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조각이 지닌 자기충족성은 모더니즘의 조건에 부합하며, 회화나 건축도 이것을 닮아야 할 것이다.

이젤 회화의 위기

이젤 회화는 서구에만 있는 산물로, 벽에 3차원의 공간 환영을 만드는 장식이다. 마네로부터 시작된 모더니즘 회화의 진화는 이것을 파괴하는 과정이고, 지금, 폴락의 시대를 맞아 모든 위계와 시종이 파괴된 지점이 도래하였다. “올-오버” 회화는 이젤 회화의 파괴를 계속 촉진할 것이다.

모더니즘 조각, 그 그림과 밀접한 과거

조각과 회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종속 관계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발전해 왔다. 알베르티 이후 조각을 따라가던 회화는 100년 뒤 베네치아에서 비로소 권위를 회복한다. 미켈란젤로 이후 조각은 활기를 잃었는데, 그 활기를 되찾게 한 것이 전문 조각가들이 아닌 회화 작가들의 조각 작업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회화적 ‘단일체 조각’은 로댕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제 단일체 조각은 또 다시 쇠락을 맞이하고 있는데, 다만 입체주의 회화에서의 실험만이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윈덤 루이스의 추상 미술 반론

미술의 경향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무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술작품들뿐이다. 나쁜 미술은 좋은 미술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비평가는 좋은 소수 작품과 나쁜 다수 작품의 차이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루이스는 추상미술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부정직하게 진술하고 있고, 개별 미술의 실례를 고찰하기보다는 추상미술을 둘러싼 화려한 수사에 대해 힐난만 하고 있다.

비잔틴 미술과의 유사성

모더니즘 미술은 조각의 환영을 거부하고 장식과 비장식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점에서 비잔틴 미술과 유사하다. 비잔틴 미술을 초월적인 것을 위하여 즉물성을 배제하고, 모더니즘 미술을 즉물적 경험을 위하여 그 밖의 모든 전통을 배제하는데, 이처럼 극과 극이 통하면서 반-환영주의 미술의 시대가 열렸다.

모더니즘 회화에서 자연이 맡은 역할에 관하여

인상주의 이후 자연을 비촉각적 2차원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진행되었고, 입체주의는 3차원의 자연 공간을 2차원적 평면으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이제 자연은 개체들이 자유롭게 놓인 공간이 아닌, 유기체적 연속체로 이해되었다. 분석적 입체주의와 인상주의가 발견한 연속체적 자연은 정합성, 통일성, 완전성의 원리를 추상미술에 넘겨주었다. 추상미술은 그 원리를 구현해야 하며, 그것에 실패한다면 한낱 공허한 장식이 될 것이다.

“미국형” 회화

회화는 그 견고한 전통 탓에 모더니즘 미술로 진화하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이러한 전통의 파괴를 대변하는 사건이 추상 표현주의, 즉 미국 회화의 대두이다. 이들 작품들은 서로 공통점이 희박하나 과거와의 단절만큼이나 많은 얽매임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추상 표현주의가 프랑스 미술에 진 빚은, 주류 미술이 어떤 느낌인지에 대한 관념이다. 미국 회화의 성립에는 파리에서 건너온 20세기 초의 거장들, 연방미술사업, 전쟁을 피한 지리적 요건 등이 영향을 미쳤다. 고르키, 드 쿠닝, 호프만, 마더웰, 고틀립, 폴락, 클라인, 스틸, 뉴먼, 로스코는 깊이의 환영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공간과 장식을 창출하는데 성공했다. 미국 화가들은 대체로 변방이라는 의식에 갇혀 소심했으나 이제는 추상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미술가들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입체주의 이후 처음으며, 이제 미국은 탁월한 미술을 갖게 되었다.

30년대 말, 뉴욕

30년대 말에 이르러, 파리에서 간과된 마티스, 클레, 미로, 칸딘스키가 8번 스트리트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회화의 변방에 있던 무명 화가들이 가장 완숙한 회화 문화 전면으로 들어섰다. 고르키, 그레이엄, 드 쿠닝, 호프만까지는 유럽을 기준으로 지방색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후에 마더웰, 폴락, 고틀립, 뉴먼, 로스코, 스틸이 부상하며 유럽 중심의 관념이 서서히 변화했다. 지방색을 극복하려던 8번 스트리트가 오히려 지방색을 재확인했다면, 이제 50년대의 10번 스트리트는 새로운 길을 닦는다.

T. S. 엘리엇: 서평

예술로서 문학의 미적 가치는 사실로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란 담론이나 명확성의 범위 너머에 있다. 엘리엇의 최근 실패는 초점이 이어지지 않고 돌발적으로 이동하는 몽타주 시를 시도함에서 비롯된다. 엘리엇은 단지 수단일 뿐인 형식과 구조에만 집중함으로서 형식과 내용의 관계는 놓쳤고, 결국 예술의 실재라 할 수 있는 경험을 주지 못했다.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추상주의를 옹호하는 미술 순수주의자들은 다른 예술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모든 예술은 사회맥락 속에서 발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 모든 예술은 지배적인 예술 분야를 닮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17, 18세기의 시각 예술은 문학을 닮아갔고, 그 결과 시각 예술은 쇠퇴했다. 문학적 주제가 중심인 시각 예술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어서 낭만주의는 매체의 특성을 눌러 감정을 전달하는데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수준낮은 감상적-문학적 회화를 다수 양산하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감상적인 연설조 모방에 봉사하는 사실적 환영은 회화의 위기를 부추겼고, 감상하는 작품이 아닌 대상의 실천적 의미를 되새기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낭만주의에 이은 아방가르드는 문학적 주제의 속박을 버리고 작품 자체로서 존중 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쿠르베와 마네를 필두로, 평면적이고 즉물적인 매체 자체로의 회화 실험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시각 예술은 음악의 추상성, 절대성, 감각성, 형식성을 동경하며 닮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각 예술은 서로 분리되어 순수한 매체를 회복하였다. 이를 통해 3차원 공간의 환영을 극복하고 순수한 감각과 경험의 예술로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언젠가는 이 추상표현주의도 다른 규준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으로 벗어나는 방법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 뿐이다. 그게 싫다면 추상미술을 소화함으로써 추상미술을 처분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추상미술의 영구 합법화나 과거로의 회귀나 정당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모더니즘 회화

칸트를 필두로, 모더니즘은 비판되고 있는 것의 절차 자체를 통해서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부로부터의 비판이다. 마찬가지로 각 예술도 고유한 순수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쳤는데, 모더니즘 회화는 미술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미술을 활용하는 것이다. 모더니즘 회화는 과거에 저항해야 했던 평면, 즉 회화만의 영역에서 자율성을 누렸다. 모더니즘은 많은 제약으로부터 해방되는만큼 되려 많은 제한조건들을 준수하게 된다. 그 까닭은 “표현적인 미술에 이르는 길이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나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의 계속이다. 미술을 제한하는 조건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모더니즘이 등장할 때마다 모든 이들이 완전한 단절을 이야기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전통의 연속성 안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모더니즘도 그런 연속성에 있다.

 


 

< 명언 >

“지적이라고 해서 그 미술가가 자신이 하고 있는 것 또는 자신이 정말 하고자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보증되지는 않는다.” 68

“모든 미술가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오는 법이고, 그렇게 빌려오는 일을 최소한으로 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133

“미적 경험의 결과를 예측하는 일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술의 전 역사는 증명한다.” 161

“재능이 없는 정직은 불완전한 정직이라고 할 법하다” 175

“미술의 경향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무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술작품들뿐이다.” 195

“미술의 경향들은 통상 그 상대편들로부터 이름을 얻어왔다.” 243

“매체의 저항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매체를 압도하라. 그러면 예술을 우발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338

“오늘날의 미술에 관해 쓰여지는 대부분의 글들은 적절히 말해 비평보다는 저널리즘에 속한다.”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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