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장의 고양이 사진이 지금까지 내가 찍은 최고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노력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 토속적인 순간을 담고 싶다는 그릇된 이분법적 시선에 이끌려 강릉 사천항에 당도했을 뿐이고, 나와 같은 시공간 속에 이 아기 고양이가 존재했을 뿐이다. 내 노력은 고작 카메라를 켜고, 무릎을 굽히고, 이 아름다운 생명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괴이한 가성을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진실한 순간은 이렇게 찾아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한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것을 붙잡는 것은 준비된 자의 몫이지만, 준비의 정도는 기회와의 조우 가능성을 조금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슬픈 진실이다. 나는 그날 다행스럽게도 이 녀석을 만났고, 내 손에는 25배 줌 렌즈가 들려 있었으며, 비로소 이 두 장의 사진으로 나는 그날 날려버렸던 모든 진실한 순간들에 대한 송가(頌詩)를 대신할 수 있었다.
이 고양이의 영혼은 천사와 같이 무결하며, 내가 자주 인용하는 <비포 선라이즈(1995)>의 명대사를 다시 한 번 입증해준다.
Jesse: Why is it, that a dog, sleeping in the sun, is so beautiful, y’know, it is, it’s beautiful, but a guy, standing at a bank machine, trying to take some money out, looks like a complete moron?
– Before Sunrise(1995)
최초의 사진미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게 ‘기술 복제(사진)’는 자본과 허세로 쇠락한 예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고, 예술의 성취를 더 많은 대중에게 돌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기록한 사진의 역사는 단지 순간의 빛을 영원히 못 박아 놓을 수 있는 신기술의 변천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진을 둘러싼 모든 세력들이 차가운 렌즈 앞에 모여서 고도의 정치적 의미들을 생성, 변화, 소멸시켜가는 거대한 충돌의 과정이었다. 벤야민에 대한 에스터 레슬리(Esther Leslie)의 편향된 애정이 담뿍 담긴 이 작은 선집은 사진이 몰고 올 미학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들을 누구보다 앞서 새겨 놓은 기민한 ‘감광판’에 대한 헌사이다.
대표 저술인 ‘사진의 작은 역사(1931)’를 비롯하여 벤야민이 남긴 7개의 글은 사진의 진정한 의미를 꿰뚫은 가장 앞선 시선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단지 앞섰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시선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에 실린 글들은 문예 주간지 기사, 서평, 여성 생활지 기사, 사적인 편지와 수필 등 그 깊이와 형태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사진을 통해 우리가 새롭게 열어젖히게 된 시각성의 발견들을 재인식하게 해 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기 사진이 자본에 의하여 혼탁해진 계기와 그 징후들에 대해 알게 되며, 비슷한 흑백의 인물 사진이라도 전혀 다른 미감의 반영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처음으로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회화와는 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할 때, 우리는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옛날 사진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사진이 시각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그 ‘결절점’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벤야민은 백지 상태의 눈을 가질 수 없는 우리를 그 곳으로 데려가며, 그 과정에서 엮은이 레슬리는 통역사로, 가이드로, 때로는 가정교사로 친밀한 손을 뻗어 준다.
이 책에서 레슬리의 역할은 더 없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벤야민 선집에서 70페이지의 엮은이 서론이 필요한 이유를 몰랐다. 레슬리는 벤야민이 언급하지 않는 시대상을 친절하게 개관하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인물들과 발견들이 나열되어 있기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벤야민에게 들어가는 길 목에서 매우 중요한 비상식량의 역할을 해 준다. 심지어 그 비상식량이 떨어질 때 쯤, 엮은이는 모든 글의 앞단에서 다시 등장하면서 기운을 북돋는다. 벤야민은 예리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지녔지만, 교수들조차 그의 박사 학위 청구논문을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로 친절함은 겸비하지 않았기에 이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레슬리에 의해 벤야민의 관점들이 ‘사후생(Fortleben)’을 얻지 못했다면, 이 책은 그저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값과 예쁘장한 양장에 기댄 안일한 기획에 그쳤을 것이다.
나의 고양이 사진이 증명하듯,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진실을 가리는 ‘거짓 아우라’를 쫒아냄으로써 존재의 ‘진짜 아우라’를 구원해야 한다. 언젠가 진짜 아우라의 도래를 염원하며, 지난한 디아스포라의 시간을 견디면서 부단한 읽기와 쓰기를 넘추지 않았던 발터 벤야민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하고 떠났다. 그래서 이 이상주의자의 숙제는 우리에게 남겨졌지만, 죄스럽게도 이제 그의 이름은 한낱 상투적인 통과의례와 레토릭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의 이름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래서인지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다.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 작품으로서 지위를 굳힌지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사진의 정치화와 미학적 성역화 과정을 동시에 되짚어 볼 수 있는 지금, 자본주의적 사진의 숙주가 매스커뮤니케이션에서 SNS로 변모해 가는 지금, 심지어 SNS가 주류 예술과 전시마저 좌지우지하려는 지금이 발터 벤야민을 해체적으로 다시 읽기에 가장 좋은 순간일 것이다.
미래의 까막눈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라즐로 모호이너지
사진의 작은 역사
초기 사진는 인간에 대한 진실한 접근에 바탕을 두었기에 아름다웠다. 하지만 사진이 돈이 되자 삼류 장사꾼들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결국 인간의 진짜 아우라가 파괴되면서 사진은 질적으로 저하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사진은 기존 예술의 가짜 아우라를 쫒아내면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새로운 사진은 사람과 사회의 본질을 가르칠 것이며, 기존 예술을 치유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순수 예술로서의 사진을 추구하는 것 보다는 예술을 복제하며 아우라를 파괴하는 사진, 사회의 진실을 보여주는 사진을 추구해야 한다.
사천항의 고양이가 귀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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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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