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의 「서평 쓰는 법: 독서의 완성」

예술 비평도 예술처럼 그것이 없는 삶보다 있는 삶에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가. 그 무언가란 무엇일까?

피터 슈젤달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비평은 편파적이고 열의에 차고 정치적이어야 한다. 즉 배타적이면서도 가장 넓은 시야를 열어주는 시각에서 씌여야 한다.

샤를 보들레르

오늘날의 미술에 관해 쓰여지는 대부분의 글들은 적절히 말해 비평보다는 저널리즘에 속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비평에 대한 금언들로 이 서평을 시작해야 하는 까닭은 서평 자체가 비평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 「서평 쓰는 법」의 저자 이원석은 그 사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고, 잊혀질만하면 계속 강조해 준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이 책은 서평 입문자들을 위한 길잡이로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본격적으로 「서평 쓰는 법」에 대한 서평을 써보자. 저자에게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사실들을 친절한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지난한 읽기와 쓰기의 시간이 압축된 결과물일 것이다. 요약과 평가가 서평의 기본이라는 점, 깊고 넓은 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콘텐스트에 위치시키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 기록 과정에서 독자 자신의 내면을 재발견하고 성숙하게 되는 것이 서평의 진정한 가치라는 점 등을 모르는 교양인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자명한 사실들을 활자화 하는 작업은 단순히 암묵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데, 이 지점에서 저자의 친절하고 간명한 화법이 빛을 발한다. 굳이 꼬박꼬박 존칭을 써가며 여러 사례를 끌어와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이 책은 그 크기와 무게 만큼이나 낮은 진입장벽으로 서평가의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흥미를 느끼면서 계속 읽어내려가게 만드는 글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미술 비평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텍스트에 대해서 평자들이 입을 모아 진실하다고 상찬해마지 않을 때, 다수의 독자들은 되려 의구심을 품게 마련이다. 도대체 진실함이란 무엇이며, 비평가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진실함이란 비평가들이 문외한들을 쫒아내고 싶을 때 사용하는 일종의 카르텔 아닌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진실함이란 어차피 변증법적/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동요이므로 동요된 자가 입증할 책임을 진다. 입증에는 합당한 논리와 아름다운 표현이 필요하다. 서평은 논리와 표현을 바탕으로 책의 진실함을 검증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진실함, 다시 말해 진정성은 대상과 매체에 대한 작가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감상적인 귀결은 마치 이 책에서 구분하고 있는 독후감과 서평의 차이를 상기시키며 첨언의 가능성을 뿌리뽑지만, 달리 형언할 묘수도 없다. 우리가 미켈란젤로의 조각만큼이나 그의 프레스코와 건축에서도 유사한 수준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자신의 모든 매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몇몇 일화에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례가 있더라도 그 매체가 다루는 대상, 즉 신 만큼은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지적했듯, “만능인이 된다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좋은 서평을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저자가 글의 형식과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사랑했는지 살펴보고, 거기에 서평가 자신의 사랑을 덧붙여 평가하면 된다. 결국 쓰레기 같은 서평이 존재하는 까닭은 저자, 혹은 서평가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허나, 저자와 서평가의 사랑이 넘쳤는데도 쓰레기 같은 서평이 출현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감추도록 강요하는 권력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슈젤달, 보들레르, 그린버그가 입을 모아 역설한 “편향된 아름다움”의 가치를 잊도록 강요받고 있다. “필자”라는 가치중립적인 주어에 숨어서 판단을 유보하는 짓거리를 겸손함으로 오인하고 있다. 인맥, 학연, 지연으로 얽히고 섥힌 좁은 세상에서 좋은게 좋은거라면서 희희낙낙하고 있다. 상대에게 나약함을 들키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먼저 나서서 상대의 나약함을 덮어주고 있다.

발터 벤야민과 롤랑 바르트가 어렵게 수확한 ‘작가의 죽음’이라는 열매는 독자의 승리를 위한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나, 판단이 거세된 세상에서는 묘비명 조차 없는 한낱 개죽음이 될 수도 있다. 작가가 죽은 자리에 우뚝 솟은 과실나무는 그 땅의 주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아래를 지나는 모든 나그네들를 위한 그늘이자 열매로서 기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맺음말로 전하는 “우리가 쓰는 오늘의 서평에 우리가 사는 사회의 내일이 달려 있”다는 말은 깊이 새길만하며, 이 글은 그런 마음으로 심는 한 그루의 가냘픈 묘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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