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쿠오 바디스」

누가 말했던가. 고전의 조건이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헨릭 시엔키에비츠(Henryk Sienkiewicz)의「쿠오 바디스」는 적어도 내게는 더이상 고전이 아니다. 고색창연한 고대 로마의 기품이 뚝뚝 묻어나는 이 책을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건만 13시간짜리 비행에서 이미 1권의 2/3을 읽어 버렸고, 2권을 캐리어에 우겨 넣지 않은 선택을 후회해야 했다. 명성에 비하면 참으로 읽는 재미가 쏠쏠한 고전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고전에 관하여 글을 쓰는 것은 참으로 재미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그런 글들이 가을 낙엽보다 무수히 깔려 있어서 내가 은행잎 한 장 더 얹어 놓는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대한 함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쿠오 바디스」는 사랑에 빠진 오만한 호민관 비니키우스가 그의 삼촌 페트로니우스의 도움으로 간교를 꾸미다가 도리어 그 여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는 마치 아침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막장성이 이어지며 독자들의 열불을 북돋는다. 아무리 인질로 사로잡힌 이민족 여인이라고 할지라도 안정적으로 타협해가면서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무리수를 두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쨋든 위기와 답답함을 조장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로 인하여 비니키우스와 순결한 기독교 신자 리기아의 사랑은 여러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여기에 네로 황제의 온갖 악덕과 향락으로 빚어진 로마의 쇠락이 이 사랑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 결국 정욕과 치정으로 시작된 사랑은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도 박해를 거치며 종교적 열정으로 승화되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연인은 복음, 사랑, 자비의 승리를 보여준다.

헨릭 시엔키에비츠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남긴 이 작품의 덕목은 수없이 많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사적인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가상의 이야기 속에 버무리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로, 베드로, 바울, 페트로니우스, 로마 대화재, 초대 교회에 대한 박해와 순교 등은 허구적 사건인 비니키우스와 리기아의 사랑에 절묘하게 맞물리며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 <벤허(1959)>를 감명 깊게 본 사람들은 유다 벤허가 갈보리 언덕을 오르는 예수와 마주한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오늘날 기독교를 있게 한 예수의 십자가 고난 사건이 한 화면에서 교합하며 사랑, 자비, 용서, 인내 등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엔키에비츠도 루 월리스(Lew. Wallace)의 원작 소설 「벤허(1880)」를 읽고 역사와 허구를 접목시키는 세련된 기법에 깊이 매료되었었다고 한다.

페트로니우스와 킬로의 대화에서 볼 수 있듯, 교양 있는 로마인들의 수사적인 대화 기법도 흥미있는 요소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확언하며 이야기 할 때 꼭 어딘가에 걸고 맹세하는 것이 관행이었나 보다. 아폴론, 헤라클레스, 비너스, 주피터 등 온갖 신에 대고 맹세하는 것은 물론 그 신의 신전에 대고 맹세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신전의 기둥이나 여사제의 옷자락 따위에 걸고 맹세하기도 하는데, 말의 내용과 수사의 대상을 결부시키는 방식이 흥미롭다. 내면의 두려움이나 진솔한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숨겨가며 온갖 수사 대상을 끌고 와서 화려한 만연체로 장식해나가는 그러한 대화 기법을 익힌 다음, 의도적으로 남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어야 할 때 써먹으면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기술은 ‘카톡’과 ‘인스타’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단문(單文) 시대’에 오히려 더욱 유용한 무기가 되리라.

어쨋든 이 작품은 긴 분량에 비하여 의외로 등장 인물이 그리 많지 않고, 이야기 구조와 상징 체계가 단순하며, 서술이 친절하고 자세하기 때문에 막연한 ‘고전 공포증’을 겪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특히 로마사와 기독교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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