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미술여행] 1일차(2/2) – 시뇨리아 광장, 미켈란젤로 광장

2018. 9. 29.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위대한 회화들과 만남을 뒤로 한 채, 지친 다리와 헛헛한 마음을 부여잡고 출구로 빠져나왔다. 엄청나게 많은 명작들 사이에 파묻혀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다 돌아서면 마치 연극 무대에서 방금 내려온 무명 배우와 같은 허한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 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서 벌어지는 난리법석이 나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인파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천천히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원래는 우피치 미술관에 이어서 베키오 궁(Palazzo Vecchio)으로 입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베키오 궁에서 국제적인 행사(Wired Next Fest 2018 Florence)가 진행되는 상황이어서 일반 관광객의 입장은 통제되는 상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도 이 인파의 일원이 되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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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파는 무엇을 쳐다 보면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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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니 거대한 소가 끄는 우마차가 보이고, 거기에는 수많은 와인병이 가지런히 실려 있고, 작은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었다.

“Chianti Rufina”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턱이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구글이 있다.

우선 루피나(Rufina)는 피렌체 도심에서 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지역이고, 끼안티 루피나(Chianti Rufina)는 여기서 바시아노(Basciano)라는 와이너리가 생산하는 와인이다. ‘비노비노 와인정보‘에 따르면 그 맛은, “가넷(Garnet)빛이 반영된 진한 루비색을 띤다. 베리, 제비꽃과 과일의 아로마가 풍부하다. 입안을 가득 감싸는 느낌이 아주 부드럽다. 훈제한 맛과 과일의 풍미가 깊게 느껴진다. 구운 육류의 특성이 잠재해 있다”고 한다.

9월은 추수의 계절이며 첫 와인을 출하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피렌체와 인근 투스카니 지역에서는 와인 출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전통행사들을 진행하는데, 내가 본 이 행렬도 그 일환이었던 것이다. 행사의 정식명칭은 “Carro Matto (Crazy Cart) in Florence”로, 굳이 번역하자자면 ‘피렌체의 미친 우마차 행렬’ 쯤 될 것이다. 이 행사는 매년 9월 마지막 토요일에 펼쳐진다. 우마차는 한 쌍의 흰 소가 끌고 가며, 여기에는 수백병의 와인이 실리게 되는데, 이것을 싣는 기술 자체가 하나의 전통 기술로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행사의 취지는 루피나에서 생산된 첫 와인을 수도인 피렌체 시내로 가지고 와서 통치자에게 바치며 축복을 받고, 모든 시민들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내가 본 장면은 통치자에게 축사를 듣고 주악을 연주하며 기쁨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대공이나 의장이 없으므로 피렌체 시장이 대신하여 행사를 주관하였다. 별도의 단이나 무대 없이 그냥 계단 위에 올라서서 다른 시민들과 뒤엉켜 행사를 주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행사의 세부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었으나, 와인 생산에 기여한 여러 가문이 앞에 나와서 시장의 덕담을 듣고 들어가고, 다시 새로운 가문이 소개를 받고 앞으로 나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형형색색의 중세 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시민들의 유쾌한 모습들은 정확히 무슨 행사인지도 잘 모르는 이방인까지 설레게 했다. 하나 같이 좋은 와인을 생산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42세의 젊은 시장 다리오 나르델라(Dario Nardella)도 무게를 잡지 않고 활짝 웃으며 축제를 즐겼다. 

시뇨리아 광장과 그 주변은 축제의 참가자와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의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행사는 드럼 연주자들의 주악과 아이들의 춤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4세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행사를 우연히 보게 되는 행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제는 케밥을 먹으며 첫날의 마지막 행선지로 향해야 할 때이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피렌체 여행자들이 하루를 마감하기 위하여 찾는 단골 코스,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이다. 

피렌체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천재에게 헌정된 미켈란젤로 광장은 주세페 포지(Giuseppe Poggi)의 설계로 1869년에 지어졌다. 당시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수도였고, 그에 걸맞는 도시 재정비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이 광장의 조성도 그 일환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없지만 청동 복제품은 있다. 그 유명한 다비드 상과 메디치 채플에 있는 네 알레고리를 조합한 이 청동상은 1873년 6월 25일에 광장으로 옮겨졌는데, 그 이동 작업에 자그마치 18마리의 소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피렌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언덕이지만 국토의 70%가 산인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5분 안에 계단을 올라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침내 언덕에 올라서서 숨을 고르다 보면 젤라또의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광장에는 마치 원형극장처럼 넓은 계단이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거기 앉아 먹고, 마시며, 경치를 즐기고, 가끔은 거리 예술가들의 공연을 볼 수도 있다. 또한 웨딩/커플 스냅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이 군중 속으로 들어와 사진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런 연인들은 대체로 한국 사람었다. 적어도 내가 본 연인들은 다 한국 사람이었다. 

연인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유난히 많은 한국인을 목격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하루를 정리 하는 곳이니 어쩌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내 앞에 한국 가족, 내 옆에 한국 연인, 그 옆의 옆에 한국 친구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정말 여기가 피렌체인지 일산호수공원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주로 미술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좋은 카메라도, 숙련된 기술도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그냥 셔터를 누르면 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이 아름다운 도시의 순간들을 망막, 가슴, 메모리 카드에 새기기 위하여 해가 저무는 내내 계단 한 켠에 앉아 멍하니 도시와 함께 호흡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베키오 다리를 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은 역시나 기쁨으로 다가왔다. 야경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다리 위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 그리고 그 아래를 유유히 지나가는 뱃사공과 연인의 대조는 이 밤의 완벽한 화음을 빚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와서 노곤함을 떨치기 위해 즐긴 야식은 불협화음을 빚어냈다. 이탈리아의 딸기 맛은 정말 형편 없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서 딸기 맛을 보고 ‘딸기가 원래 단 과일이었어?’라며 깜짝 놀란다던 이야기를 이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단 딸기’의 존재도 모르고 살아가는 현지인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1. 일부 도판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며, 장비는 Sony RX10 MK3이다.
  2. 작가, 장소, 작품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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