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던컨의 「미술관이라는 환상: 문명화의 의례와 권력의 공간」

원제는 「Civilizing Rituals: Inside Public Art Museums」이다. 날로 허약해지는 우리나라의 출판시장을 고려할 때 딱딱한 학술서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적어도 ‘환상’이라는 단어는 쓰면 안됐다. 이 단어를 쓰면 실체가 없는 허상을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의례, 서열, 권력, 젠더는 허상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허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작동 과정과 원리를 논증하기 위해 캐롤 던컨(Carol Duncan)이 보여준 세심한 안목을 고려할 때, 미술관의 전략 자체가 마치 신기루인 것처럼 표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도널드 프레지오시(Donald Preziosi)가 엮은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과 비평 40선」에서 이 책의 일부를 처음 접했다. 이 선집에는 「미술관이라는 환상」의 1장인 ‘의례로서의 미술관’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계몽주의 시대의 근대미술관이 외관상 고대 신전을 닮아가고, 내용상으로는 종교의 의례를 차용했던 전략을 서서히 드러내는데, 내가 암암리에 가졌던 느낌들의 구체적인 명문화였기 때문에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는 듯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 매료된 직후, 근대미술관과 관련된 몇몇 도서와 논문들을 더 탐색하여 내가 운영하고 있는 미술사 연구회에서 ‘미술관이 미술사가 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책의 번역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예술과 문화」를 읽다가 책 맨 뒤에 첨부된 ‘경성대문화총서’ 목록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만약 주제발표를 하기 전에 이 번역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내 발표 내용은 훨씬 영양가 있었을 것이라는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더불어, 양질의 교양서를 계속 내주는 경성대학교출판부 관계자들에게 감사 드린다.)

이 책은 미술사뿐 만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미술감상에 있어서도 미술관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구체적인 역사와 동시대 현장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풀어낸다. 미술관 본연의 임무는 수집, 보존, 연구, 전시이지만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후원자의 정당성을 보장해주기 위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후원자는 현실 정치의 권력자이거나 실물경제의 자본가인 경우가 많고, 그들에게 득이 되지 못하는 목소리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거나 주변부로 내몰린다. 그러한 분열의 전략은 관람자의 내밀한 사고체계 속에 의심하지 못하는 학문적/도덕적 진리의 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소외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일종의 폭압으로 귀결된다.

미술관이 권력구조를 투영하고 더욱 공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채택하는 전략이 ‘의례’이다. 고대로부터 의례는 사람들을 일상적 삶의 소소한 경험들로부터 벗어나 정념이 사라진 무(無)의 순간, 즉 정신적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일종의 전이지대(liminality)로서 널리 활용되었다. 이러한 정신적 세계는 공동체를 한데 엮어주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현재의 억압적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혁명을 통해 왕과 귀족의 소유물에서 교양 있는 시민들의 오브제로 변모한 예술작품과 근대적 미술관은 계몽주의의 논리에 입각하여 철저히 학술적이고도 이성적인 가치들을 구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그 운영의 실상에서는 중세 성당의 의례들을 철저히 전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금박 액자로 표구된 개별 작품들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경건한 기운을 내뿜는다. 관람객은 미술사적으로 철저히 계보화된 동선을 따라 의례에 참여한다. 작품들은 전자 센서와 차단선, 그리고 감시자의 ‘눈’을 통해 예술의 성전에서 마치 영원할 것처럼 보호 받고 있으며, 그 작품이 내포하는 가치들은 기증자, 후원자, 이전 소유자의 인격과 포개진다. 또 그 가치의 저변은 점차 확장되어 해당 미술관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국가의 역사, 그리고 그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의 정당성과 대구를 이룬다.

캐롤은 이러한 미술관의 전략들을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세심하게 건져 올린다. 루브르 박물관은 시민들이 쟁취한 급진적인 혁명의 소산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컬렉션을 완성한 것은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적 착취였다. 루브르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부터 출발하여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성스러운 미술사 여정의 종착지에 프랑스를 위치시킨다. 영국의 내셔널갤러리는 프랑스와 달리 중간계층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토지귀족들은 무관심했거나 반발했지만 루브르가 이루어낸 눈부신 성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내셔널갤러리는 영국의 루브르가 되었다.

미국의 근대적 미술관은 또 다르다. 이 자본주의 신세계에서는 단두대에 올릴만한 왕과 귀족이 없었다. 하지만 앵글로색슨 출신의 상업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유럽 계보를 정당화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유럽 회화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들은 새롭게 태동하는 부의 원천을 찾아 세계 각지에서 도시로 몰려오는 이민자들에게 미국 시민의 모범을 보여주고 그들의 진정한 지배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미술관을 활용하였다. 결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것을 성립한 부르주아들을 기리는 특권적 공간이 되었다. 미술관 전체가 기증자들에게 헌정하는 공간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 것이다. 미국 미술관에서 미술사적 배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자본가 J.P.모건(Morgan)의 공이 컸다. 메트로폴리탄의 이사회장을 맡았던 그는 저명한 미술사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의 도움을 받아 미술사적 배치를 도입했다. 하지만 기증자들에게 헌정하는 공간들은 좀비처럼 이내 다시 부활했으며, 이 공간들은 예외 없이 앵글로색슨 조상들을 기리며 가문을 정당화하는 전략으로 변질되었다.

미국의 미술관 중에서도 거부들의 이름을 딴 개인 미술관들은 공공미술관보다 훨씬 노골적인 의례들을 강요한다. 대체로 자본가들의 저택을 개조해서 만든 이 미술관들은 개인의 수집품을 공공의 학습과 교양증진을 위하여 공개한 것처럼 미화시키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기리고, 참배하고, 영속화시키려는 욕망의 발현일 뿐이다. 이러한 저택 미술관들은 영원한 기념비를 남기고 싶었던 중세 지배자들의 ‘대성당 영묘’ 문화와도 맞닿아 있으며, 그중 대다수는 지금도 실제 봉분의 역할을 겸업하고 있다. 현세에서 위대한 권력을 쥐었던 자들일수록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욕망 또한 크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역사의 진리이며, 저택 미술관들이 그 진리의 상징이다. 

캐롤은 현재의 미술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놓치지 않는다. MoMA로 대표되는 동시대 미국의 미술관은 모더니즘적 형식주의에 입각하여 위대한 (미국) 천재들이 추상성을 구현하기 위해 쏟은 땀의 계보학을 수립하고 이를 찬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 계보학의 시발점에는 익명화된 (괴물) 여성을 그린 남성 모더니스트들이 탁월한 선각자로 고정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페미니즘 관점으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6-1907)>과 드 쿠닝의 <여성I(1952)>을 해체한다(p.235-256). 정신분석학과 ‘팬트하우스(Penthouse)’ 紙 광고까지 넘나드는 이 비평 사례는 기존의 미술사적 접근과 확연히 다르면서도 매우 명쾌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라도 이 대목만큼은 꼭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어쨌든 요지는, 여성의 생리적 능력과 경험적 세계에서의 우월성에 대하여 갖는 남성 모더니스트들의 애착과 공포가 여성을 괴물로 만드는 추상성을 창조하였고, 그러한 작업이 형식적/도덕적으로 정당화되면서 천재의 계보학에서 정점의 지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왕좌에 앉도록 기여한 최고의 공신 중 하나가 바로 현대미술관이었다. 현대미술관은 분명히 성별로 젠더화 되어 있고, 여성을 그린 남성의 탐구를 도덕적인 것으로 보정하며, 추상의 의지 자체를 현세의 모든 여성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하고, 도전하고, 자아를 발견하는 진취적 (남성의) 욕망으로서 찬양해왔다.

저자가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가지고 이렇게 역사학적/문화인류학적 논증을 거듭해온 까닭은 결국 미술이 정치적이어야 하고, 소외된 자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 신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던 상관없이 미술관의 전략과 그 구체적인 실행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미술관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미학적 헌법이며, 그 누구도 이 보편적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과 영향력으로 매일매일 기준을 만들고 있고, 또 한편으로 그 기준에 지배당하고 있다. 결국 기준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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